▲예전 할머니가 집 방문위에 걸어놓았던 액자 사진
김현숙
김단야(태연)는 1900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나 친일파 미국인 교장에 대항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했다.
1919년 3.1운동 때 개령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그해 12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회'가 끝나고 레닌을 만난 그는 민족해방의 목표를 공산주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훗날 <조선일보>에 '레닌회견인상기'를 연재했다.
다시 상해에 가서 활동한 그는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을 국내로 들여오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는 기자 생활을 하는 한편 '조선공산당'(줄여서 조공)과 그 아래 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공 간부와 박헌영, 주세죽 등이 검거되자 그는 검거를 피해 다시 상해로 도피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와 동지들은 민족협동전선을 펴서 대규모 반일시위를 일으키려고 했다. 국내에서 권오설이 6·10투쟁특별위원회 책임을 맡아 추진하기로 했다. 김단야는 상해에서 선전 격문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檄)한다. 창덕궁 주인 서거에 제(즈음)하여"(전 조선민중의 단결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음)를 작성, 권오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그러나 6월 7일에 격문이 발각되어 권오설이 체포되면서 대규모 만세시위는 좌절되고 일부만으로 그쳤다.
1934년 1월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 대숙청(소련의 당과 군대, 정부 기관 인사와 외국 공산당 지도부와 일반당원 대상, 정적을 트로츠키주의자나 간첩으로 몰아 숙청)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테러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서 제1급 범죄자"라는 판결 직후 사형되었다. (1938년 2월 13일)
해방이 되어도 김단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김종원은 아들이 처형당한 사실을 몰랐다. 그는 혹시 소식을 들을까 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1946년 5월 2일치 <조선인민보> 기사에 그 아버지의 아들 찾는 사연이 적혀 있기도 하다.
김진하씨와 김현숙씨의 구술 내용을 종합하면, 아들을 찾지 못한 아버지가 손자인 진섭을 북한에 보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해방둥이인 갓난아이와 아내를 두고 김진섭은 북으로 갔다. 김진하씨는 그가 북한에서 결혼을 하여 아들이 하나 있었다고 하나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6.25전쟁 때 그는 인민군 소좌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우익들에 대한 보복을 막았다. 목숨을 건진 이들 중엔 마을 친구들인 우익경찰들이 있었다고 한다.(<영남일보> 1997.4.29.)
전쟁이 끝나고 인민군들이 퇴각할 때 그는 따라가지 않고 처갓집 마루 밑을 파서 조그마한 뒤주 안에 숨어 살았다. 남편이 없는데 그 아내의 배가 불러오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다그치자 결국 김진섭은 발각되고 대구로 끌려가 갇혔다.
그래서 1952년생인 김현숙씨는 "애가 생기는 바람에 아버지가 잡혀 가셨어요"라고 했다. 김단야의 부인인 윤재분은 아들의 구명을 위해 적극 나섰다. 마을에 살고 있는 대법원 판사집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아마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김진섭 덕분에 목숨을 건진 친구들의 도움도 컸을 것이다. 그는 석방되어 개령에 살면서 민주당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숙씨 세 자매가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시고 그들은 할머니가 키웠다. 김현숙씨 기억으로는 할머니가 커다란 보따리에 속옷을 넣어 팔러 다녔다고 한다. 방문 위 액자에 걸린 할아버지 사진, 가끔 말이 없으신 할머니가 속울음 우는 걸 보았던 기억도 더불어 했다.
"독립유공자 인정 받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결혼하고 구미에 살던 현숙씨는 1993년 한 통의 엽서를 받았다. 전국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던 이명호(월간지 기자)라는 분이 개령에 보낸 것이었다. 근처 마을에서 동장을 하던 외숙부가 이를 보고, 현숙씨에게 전달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진작부터 할머니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집에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할아버지 때문에 한약방도 못하게 되었고, 집안 사람들은 제대로 직업을 가질 수 없어 뿔뿔이 흩어져 어렵게 살고 있었으니 감히 독립운동가 집안이라 자랑스럽게 말할 수도 없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나 김단야에 대해 연구하던 김도형 현 독립기념관 연구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그를 만나 여러 자료를 건네받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할아버지의 공적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 시작되었다.
"부산(당시 자료가 부산에 마이크로 필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에 가서 복사를 해 다시 서울로 이명호씨를 만나러 갔어요. 국회도서관, 규장각 도서관을 가야 한다고 해서 막막했는데, 마침 공훈록이 나와서 할아버지 이름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어려운데 가짜유공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요?"
할아버지 죽음에 대한 기록은 전현수 경북대 교수가 러시아에서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에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로 서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