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대표하는 국악인 양소운이 공연한 봉산탈춤 중 '미얄할미'
양소운
2021년, 경동한증막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인천의 기억 속에 경동한증막과 '황해도 노래'는 살아있어야 한다. 인천에는 특히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한국전쟁 후 인천은 실향민의 '제2의 고향'이다. 인천의 중구와 동구에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황해도 노래'에 등장하는 봉산탈춤(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과 평산소놀음굿(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이 올곧게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북에서 내려와 인천에 정착한 실향민들의 덕분이다. 한증막은 모진 세파 속에 시달리면서도 고향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장소였다.
이른 아침이면, 한증막 앞 리어카엔 나뭇가지가 수북했다. 그 나무들은 모두 한증막에서 사용했다. 하인천 어물전 주인, 싸리재 채미전(참외전)의 채소상인, 송림학교 건너편 연백상회에서 내걸고 쌀장사를 하던 그들이 때가 되면 한증막에 모였다. 굳이 날을 잡지도 않았다. 날씨 탓에 몸이 찌뿌드드해지고, 괜히 고향 생각이 더 나는 날이면 거기 모였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 보겠네
한증막에 모인 사람들이 '몽금포타령'을 부를 때면, 한쪽에서 놓여있던 커다란 장구가 어느새 누군가에 의해서 신명난 장단을 치고 있었다. 때론 수심가의 슬픈 곡조로, 때론 난봉가의 경쾌한 가락으로, 한증막에 모인 실향민은 그들 나름의 문화를 거기서 만들어갔다. 그 소리는 한증막을 타고 나와 꽤 멀리 퍼졌다.
경동한증막은 여성전용이었다. 남자아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을까? 우리집 대문을 열면 한증막이 바로 보였다. 외할머니는 한증막의 단골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1960년대에는 초등학교 남자아이가 한증막을 출입하고, 여자아이가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성목욕탕(경동 98번지) 남탕에 오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우시조 '나비야 청산가자'를 부르실 때, 동네오빠들과 어울려 여자아이는 '나리나리 개나리'를 부르면서 즐겁게 놀았다. 우리 동네가 그랬다. 1960년대, 싸리재 주변이 그랬다.
양소운 명창의 배뱅이굿
한증막에서 노랫소리가 뜸해진 건 언제쯤일까? 1974년쯤이다. 그 해 5월, 인천에 제2도크가 준공됐다. 대통령이 오고, 인천에서 도로정비와 미화에 박차를 가했다. 인천시내의 많은 간판이 새로 달렸다. 기억컨대, 이때쯤 인천에서는 '황해도 노래'에 나오는 지명의 간판이 거의 사라졌다.
인천의 토지대장을 살피면, 더 정확하게 알게 되리라. '반공방첩'의 표어가 여기저기 걸려있던 시대에, 북한과 연관된 지명을 강조한다는 것이 때론 불안심리로 작용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