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31일, 한나라당 내 소장파로 분류되던 정병국, 오세훈, 남경필 의원이 이재오 총장의 사퇴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
이종호
여기서 오 당선인의 주가를 더 높인 건 '개혁보수'란 이미지였다.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국민들의 정치개혁 요구가 드높았던 때,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를 맡아 이른바 '오세훈법'을 만들었다(2004년). 기업의 후원금 기부금을 금지했고, 국회의원 후원회로만 정치자금을 모으게 했다. 또한 당시 '돈 먹는 하마'라고 비판받던 지구당마저 폐지시켰다. 이는 현행 정치자금법의 기본 뼈대로 여전히 기능 중이다.
당의 인적쇄신에도 열성이었다. 그는 남경필·원희룡·정병국 등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이었던 '미래연대'에서 활동하면서 2003년 당 연찬회를 전후해 '5·6공 인사 퇴진론' 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정풍운동을 벌였다. 또 재선이 유력시 되던 상황임에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당의 세대교체를 견인했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는 정치역정의 '최고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참여정부 법무부장관 출신 강금실 열린우리당 후보에 맞설 대항마로 긴급 차출된 그는 당내 경선에서 맹형규·홍준표 등 경쟁자들을 꺾고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강금실 후보를 33.74%p 차로 꺾었다. 이때 오 당선인의 나이는 46세.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이었다.
시장 재임 땐 '디자인 서울'을 강조하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광화문 광장 등 대형 토목사업을 잇달아 추진했다. 세빛둥둥섬과 경인아라뱃길, 수상택시 등 '한강르네상스' 사업도 그 일환이었다. 주변 전세시세의 80% 이하로 최장 20년간 살 수 있는 장기전세주택 '시프트(Shift)'도 오 당선인의 시장 재임시 역점 사업으로 볼 수 있다. '전시행정' '혈세낭비' 등의 비판과 논란이 따라 붙었지만, 일각에선 서울시의 청렴도와 도시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렸단 긍정적 평가도 내놓는다. 이 때문이었을까. 오 당선인은 야권 단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2010년 지방선거 때도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0.6%p 차 신승을 거뒀다.
하지만 '정치인 오세훈'의 상승세는 여기까지였다.
쉽지 않았던 야인 탈출기
2011년 8월 이후 그는 오랫동안 '야인(野人)'이었다. 시장직 사퇴 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등을 지내면서 정치권과 거리를 뒀고, 2014년엔 KOICA 중장기자문단 신분으로 르완다와 페루를 방문했다. 귀국 후 자신의 정책구상을 담은 책 <오세훈, 길을 떠나 다시 배우다>를 내고 대학 특강·토크콘서트 등을 진행했다. 정치적 재기를 위한 '워밍업'이었다.
그러나 패배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오 당선인은 2016년 20대 서울 종로구에 도전장을 냈지만 당시 정세균 후보에게 패했다. 선거기간 내내 최대 17%p 이상 앞섰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지만, 개표 결과는 오히려 자신이 약 12%p 차로 패한 결과였다. 2017년 탄핵 정국 땐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을 탈당, 바른정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바른정당과 국민의당 합당(바른미래당의 전신)에 반발해 다시 2018년 11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으로 복귀했다.
2019년 2월엔 "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당권 도전에 나섰다. 자신을 당의 '개혁보수'로 자리매김하면서 중도층 공략을 주문한 것. 하지만 당시 승자는 '당심'에서 우위를 차지한 황교안 전 대표였다. 오 당선인은 당시 일반국민 여론조사에서 황 전 대표를 12.5p 차로 앞섰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32.4%p 차로 크게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