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댐. 상시만수위(41m)와 계획홍수위(46m)를 알려주는 표시가 선명하다.
뉴스사천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전국 24개의 댐 가운데 유일하게도 인공 방류구를 지닌 남강댐. 이 인공 방류구는 자연적인 유역을 벗어난 곳으로 향한다. 그래야 홍수 예방 효과가 뛰어나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음이다. 그런데 하필 인공 방류구가 향하는 곳은 사천만이다. 이로써 경남 사천시는 뜻밖에 물벼락을 맞게 됐다. 물론 인근 지자체인 남해군, 하동군, 고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영향을 받을 테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아주 '쌈박'할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 남강댐과 그에 딸린 인공 방류구는 어떻게 등장했을까. 그 출발은 무려 1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오른다.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제국이 1920년부터 5년에 걸쳐 낙동강의 '종합개수계획'을 세웠다. 이때 '남강 방수로'를 처음 떠올렸다. 밀양시 삼랑진에서 양산시 물금에 이르는 19km 구간의 낙동강 폭이 너무 좁다는 판단에 따라, 홍수가 나면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바로 빼기로 한 것이다. 이러면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창녕군 남지의 하천 수위가 0.7m쯤 내려갈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계획은 바로 실행되지 않았다. 남강과 낙동강 하류의 하천 둑은 1926~1934년에 정비했지만, 산을 하나 걷어내어야 하는 방수로 공사는 이 시기에 시작조차 못 했던 것이다. 그러다 1934년과 1936년 두 번의 큰 홍수를 겪으며, 일제는 남강 방수로의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여겼다. 이에 1939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200만㎥의 토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곧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공사는 중단됐다. 이때가 1차 방수로 공사였다면, 2차 공사는 1949년에 시작됐다. 하지만 이듬해 일어난 한국전쟁 때문에 공사는 다시 멈췄다.
남강 방수로 3차 공사는 경제개발 5개년 사업에 포함되어 1962년부터 시작됐다. 남강댐 공사와 함께였다. 처음엔 홍수 예방 효과만 기대했으나, 이 무렵 정부는 홍수 조절에 더해 다양한 목적의 용수 공급과 수력 발전까지 담당하는 다목적댐으로서의 남강댐을 구상했다. 그 결과 1969년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댐, 인공 방류구와 방수로, 발전시설을 차례로 갖추면서 남강댐이 완성됐다. 이때의 남강댐을 편의상 옛 남강댐이라 부른다. 이유는 2000년에 이르러 남강댐이 더 큰 규모로 사실상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려운 공사 끝에 태어난 옛 남강댐. 그러나 물그릇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총 저류량은 1억 3630만㎥였고, 유효 저류량은 1억 878만㎥에 그쳤다. 이때 만들어진 방류구는 2개. 하나는 남강 본류로 흐르는 일류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만으로 흐르는 제수문이다. 당시 세웠던 홍수 시 방류 계획은 이렇다. 남강 본류로 1초에 최대 2000㎥(=톤), 그리고 나머지는 사천만으로 흘려보낸다는 거였다. 비록 계획홍수량으로 1초에 5460톤을 사천만으로 흘려보내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지만, 극심한 홍수가 발생할 경우엔 그 이상으로도 흘려보낼 수 있도록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이다.
남강댐의 물그릇이 너무 작음을 깨달은 정부는 곧 댐 증설 계획을 세운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에 '남강 다목적댐 보강공사'에 들어갔고, 2000년에 공사를 끝냈다. 이렇게 태어난 게 지금의 남강댐, 즉 신 남강댐이다. 이때 남강댐과 제수문은 기존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수백 미터 이상 내려온 곳에 재시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