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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100여권에 남겨놓은 엄마의 책편지

[무소비 육아] 우리집 책에만 있는 특별한 페이지... 아이 마음속에 평생 남기를

등록 2021.05.03 12:58수정 2021.05.0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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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돈을 써야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소비하지 않고도 재밌고 다채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을 겁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의 '무소비 OO'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나는 집에서 가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곤 한다. 내가 탐독했던 책들의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어서다. 그런데 빈틈없이 꽉 찬 책장과 더는 꽂아둘 데가 없어 집 안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책이 마냥 버거워진다. 책들을 정리할 시기가 온 것이다.

거실 책장 맨 위 칸에 있는 책부터 책등을 손으로 짚어가며 질문을 시작한다. 첫 번째 질문을 한다. '재밌게 읽은 책인가?' 예전에는 이 질문만 통과해도 책은 무사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책을 다 소장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이 추가되었다. '또 볼 책인가?' 두 번째 질문에서 책을 많이 솎아낸다.


"이 책은 추억이잖아요"

이제 나는 아이 책 쪽으로 간다. 아이가 요즘 잘 보지 않는 책, 연령에 너무 맞지 않은 책들을 빼낸다. 아이는 내가 빼놓은 책들을 몇 권 들춰보더니 말한다.

"엄마. 이거 버리려고요?"
"이제 잘 안 보잖아. 안 보는 건 기부하거나 동생들한테 물려주자."
"싫어요. 이 책은 우리 추억이잖아요. 내가 계속 갖고 싶어요. 추억은 간직해야죠."


아이가 못 버리게 하는 책들에는 편지가 붙어 있다. 아이가 어렸을 적 나는 아이 그림책에 편지를 써서 붙여 놓았다. 가끔 꽤 긴 편지를 붙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작은 메모 편지들이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진혜련
 
처음 편지를 써서 그림책에 붙인 것은 아이가 돌도 되기 전이었다. 나는 얼른 아이와 그림책을 읽고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였다. 나는 아이가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써서 그림책에 붙였다.

나는 편지에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가르침을 쓰지 않았다. 편하게 말하듯이 썼다. 나는 다만 아이가 책을 펼쳤을 때 엄마 편지를 보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책을 읽길 바랄 뿐이었다.


"콩이 어떻게 잘 자라나 했더니 낮에는 햇님이, 밤에는 달님이 토닥토닥 해줘서 그랬던 거였구나. 토닥토닥해주면 힘이 나잖아. 엄마도 그래. 엄마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도현이가 엄마한테 와서 토닥토닥해주면 속상한 마음이 싹 풀리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위로해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도현아. 힘이 들 땐 언제나 엄마에게 오렴. 힘든 일, 억울한 일 마음 놓고 얘기해. 엄마가 도현이 하고 싶은 이야기 다 들어주고 토닥토닥해줄게." - <콩이 쑥쑥> 엄마의 책편지 중에서

책의 한 페이지가 된 엄마의 편지


편지에 들어가는 내용은 다양하다. 아이가 책에서 좋아했던 장면과 반응, 책에 대한 엄마의 생각이나 느낌, 아이가 좀 커서는 책을 읽고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썼다. 또한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책을 사거나 읽었던 장소의 풍경을 쓰기도 했고, 때로는 책 속 주인공이 아이에게 편지를 써주는 것처럼 쓰기도 했다. 책편지에는 그 시절 아이의 모습과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사랑의 말들이 담겨 있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진혜련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진혜련
 
책에 엄마 편지가 붙어 있으면 아이는 그 책을 더 사랑하게 된다. 아이는 어떤 이야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좋아한다. 편지를 읽어주면 그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귀 기울여 듣는지 모른다.

하루는 아이가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가져왔는데 책에 긴 편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목도 아프고 그 책을 전에 여러 번 읽었던 터라 편지를 은근슬쩍 건너뛰고 책을 읽었다. 그러자 아이는 편지는 왜 안 읽냐면서 어서 그것부터 읽어달라고 했다. 아이에게는 엄마의 편지도 책의 한 페이지였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진혜련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
아이 그림책에 붙여놓은 책편지입니다.진혜련
 
올해 아홉 살이 된 아이는 이따금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마음이 터질 정도로 감동이야'라고 말하고, 호수 앞 벤치에 앉아 '저 물결이 내 이불이었으면'이라고 말한다. 시골 책방에서 하는 동시 쓰기 수업을 듣고 와서는 '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이 웃음이 내 마음에 일주일은 남겠지'라는 말을 하여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아이는 이제 저 책들을 자주 읽진 않지만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아이에게 책은 엄마의 사랑이고, 우리의 추억이 되었다. 아무래도 100권이 훌쩍 넘는 저 책들을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림책 #편지 #엄마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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