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전경1935년 조선에서 열린 도서관대회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열렸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있었으나, 일본제국의 도서관인이 모이는 행사를 개최하기에 경성제국대학이 더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경성에서 열린 도서관대회에서 정두현은 도서관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국대학'은 일본제국 안에 설립된 '최상위 교육기관'이었다. 일본 본토에 7개 제국대학(도쿄, 교토,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오사카, 나고야)이 문을 열었고, 조선(경성제국대학)과 타이완(다이호쿠제국대학)에 각각 1개씩 개교했다.
그 시절 '제국대학'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지금의 서울대학교보다 더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입학 정원이 지금보다 적었고, 일본인을 많이 뽑았기 때문에 서울대보다 입학하기 어려웠다.
제국대학 졸업생은 일본제국의 고급 관료로 임용되는 '특혜'를 얻거나, 제국 엘리트로 '특권'을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정두현이 제국대학 세 곳을 나왔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도쿄대.타이완대학을 차례로 다닌 것만큼 어렵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역대급 '스펙'을 자랑한 정두현의 삶을 따라가 보자.
정두현은 평양일어학교와 평양숭실중학교를 거쳐, 1907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서 공부했다. 1910년 정두현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
191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도쿄제대 농학부 동물학 연구실 연구생으로 있다가, 1916년 9월 귀국했다.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교사와 숭덕학교 교감으로 일하던 정두현은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그는 4개월 넘게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교감으로 일하던 '인텔리'가 3.1 운동에 참여해서 투옥되기까지 했으니, 이 대목도 시선을 끈다.
정두현은 숭덕학교 교장을 거쳐, 1923년부터 1927년까지 평양 숭인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교육자로 지내던 그는 1927년 4월,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부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도호쿠제국대학(1907)은 도쿄제국대학(1886), 교토제국대학(1897)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이다.
도쿄제대가 '도다이'(東大)라 불린 것처럼 도호쿠제대는 '호쿠다이'(北大)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남녀공학을 실시한 대학이며, 연구 제일주의와 문호 개방주의를 내건 학교였다. '호쿠다이'에 진학할 때 정두현의 나이는 39세였다.
도호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31년 귀국한 정두현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장남이었던 정두현에게는 형제가 있었다. 셋째 동생 정광현(鄭光鉉)은 정두현처럼 도쿄제국대학 법률학부(영법과)를 졸업하고, 경제학부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정광현은 1928년 9월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일했다.
정두현과 그의 동생 정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