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책표지후마니타스
책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정작 자신들은 존중받지 못하는 방송 제작 현장 노동자들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며 세상을 떠난 故 이한빛 피디의 어머니가 쓴 책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어린 혹은 다 자란 자녀가 있는 모든 부모와 교사들에게 육아 및 교육 필독서로 권하고 싶다.
제목과 저자에 관한 정보만으로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과 이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분노 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주된 내용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책의 260여 페이지 중 3분의 2에 달하는 내용이 한빛과 한솔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대학시절, 그리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보내기까지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온마음과 정성으로 최선을 다해 함께 해온 소중한 시간의 기록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이기도 하셨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는 분이었다. 퇴임하시고도 학교 운동장에 가길 좋아하셨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좋아하셨다. 친정집은 포천초등학교 앞이었는데 아버지는 매일 한빛을 데리고 초등학교에 가셨다. 한빛은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퇴근하다가 교문 안을 들여다보면 아버지가 시소에 앉아 계시고 한빛이 운동장을 안방인 양 눕고 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한빛아!" 하고 부르면 뒤뚱뒤뚱하며 뛰어와 안기는데 온통 흙투성이라 꼬옥 안아 주기가 주저될 때도 있었다.
-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105쪽
한빛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속을 슬쩍 엿보고 싶었으나 '나는 네가 이렇게 대학 생활을 했으면 해. 네가 이렇게 청년 시절을 보냈으면 해'하고 솔직히 말하지는 못했다. 한빛이 편한 길을 걷길 바라면서도, 그렇다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지내지는 않을 것 같아 애매하게 묻곤 했다. 왜 나는 핵심을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렸을까? 아들을 존중해서였을까? (중략) 혹시 괜찮은 엄마로 남기 위해 자식을 지켜보는 쪽으로 스스로 포장한 것을 아니었을까? 그래서 삶이 버겁지는 않았을까?
- 「힘들게 쓴 답장」 42쪽
슬픔을 꾹꾹 눌러 적어나간 그리움의 문장들은 40여 년 간 교직에 몸담았던, 한빛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한빛의 외할아버지가 교사와 부모로서 한 아이를 어떤 존재로 바라보았는지, 어떻게 존중하고 사랑하고 온전히 지켜주었는지를 더는 솔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보여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실상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머니인 저자는 고맙고 가슴 아프게도 아이들과 함께한 모든 순간의 경험을 카메라 영상으로 담아내듯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되살려내어 보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어떤 부모
그런데도 정작 부모는 자신들이 아들에게 사회 정의와 책임을 너무나 일찍부터 무겁게 가르친 것이 아닌가,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돌보는 것이 그 나이 때 했어야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자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아들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카메라 뒤 소외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지난겨울 국회 앞에서 29일간 단식투쟁을 했던 아버지는 자신이 전교조 해직 교사였던 것이 한빛의 마지막 선택에 영향을 준 것만 같아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멍에로 남을 것'이라며 괴로워한다.
어머니는 자신보다 훌륭한 성품을 지닌 아들에게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느라 직장인 아들의 고민을 눈치도 못 채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떠나보낸 것이 못내 안타까워 '미안하다'는 말만 되뇐다.
내 자식이 힘들까 봐 세상 부모들이 하는 걱정을 속마음으로 수없이 삼키며 자식이라는 언덕을 하나 넘을 때마다, 예외 없이 매 순간 깨닫고 성찰하고 다시금 부모로서의 자세를 고쳐세우는 그 모습들이 너무나 옳고 따뜻해서 가슴이 저린다. 자신들이 보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온 이런 부모를 한빛이 하늘에서 원망할까.
너무나 옳은 부모라서, 너무나 옳지 않은 부모라서 한빛이 이토록 옳은 사람으로 성장했을 리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길을 돌아왔어도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안전하고 옳은 길을 찾아 결국 그 길을 향해 자연히 걸어갔을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은 일상의 삶이 묻어나는 에세이나 동화,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초보 습작생들에게도 좋은 예가 될 듯하다. 단어와 문장의 문학적인 선택과 조합, 행간의 여백이 주는 자유, 문체와 뉘앙스, 작가에게서 풍기는 정직한 사람의 냄새를 사랑하는 나에게 이 책의 모든 문장은 그 자체로 완벽해서 읽는 내내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즐거웠다.
에세이 형식의 자유로운 글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서사와 심리묘사가 풍부한 이야기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저자가 국어교사로서 평생 다독하고 일기를 써온 내공이 글에서 단단히 느껴진다. 한 나라의 무정한 문화와 역사가 어떻게 평범하고 단란했던 한 가족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슬프지만 찬란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 어린 청소년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다정한 엄마 선생님의 언어로 쓰여있다.
책을 읽는 동안 그저 시냇물처럼 강물처럼 눈과 마음이 자유롭게 졸졸 흘러간다. 때로는 작은 잎사귀에 간질여지듯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며 평화롭게, 때로는 폭포처럼 강렬하게, 때로는 비바람과 소용돌이에 헤매기도 하지만 이야기는 이내 제 물길을 따라 담담하게 다시 먼바다를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우리 시대의 슬픈 비극이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름다운 이야기, 한빛과 그를 사랑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향기를 햇살 눈부신 오월에 독자들도 함께 진하게 느껴보기를 바란다.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 먼저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약속의 말들
김혜영 (지은이),
후마니타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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