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곳은 한빛센터가 위탁운영하는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이기도 하다. 한빛센터는 고 이한빛 PD의 유지를 이어 받아 설립된 단체로, 방송사 및 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및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 낡은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한다.
나익수
김혜영씨를 만나, 먼저 어떻게 지내시는지 여쭸다.
"퇴직하고 딱히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충남 도고에 있는 집으로 갔어요. 7년쯤 전에, 퇴직하면 살 계획으로 마련한 집이죠. 오늘 오면서 아들이 잠들어 있는 의정부 성당에 들렀다 왔지요. 늘 서울에 오면 아들 먼저 보고 일을 봐요."
"한빛씨 흔적이 있는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많이 울었죠.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는 걸 알았어요. 나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고요.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한빛이 짐은 도고 집에 다 있어요.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버릴 수는 없고, 참 그래요."
김혜영씨는 퇴임을 1년 반 앞두고 고양시로 교장 발령이 났다고 한다. 한빛과 살았던 집을 떠나고 싶었는데, 핑계가 생겼다. 더구나 교사로서 마지막을 학교 가까이에서 차분히 정리하고도 싶었다고 한다. 한빛의 흔적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남편을 설득하여 2019년 초에 고양시에서 2년을 살았다.
막상 퇴임하고 나니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 도고의 시골집으로 갔다. 조용한 시골에서 틈틈이 텃밭 농사도 지으며 산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용해도 슬프고 바빠도 슬픈 마음은 쉬 사그라지지 않는다며 또 울컥하신다.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처음부터 국어 교사가 되고 싶으셨어요?"
"어려서 꿈이 교사였어요.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아버지가 교사여선지 직업이 다양한지도 몰랐어요. 교사뿐인 줄 알았죠. 섬마을 교사 같은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었죠."
한빛씨 얘기를 하면 더 가라앉을까 봐 이쯤에서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어떻게 해서 교사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김혜영씨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받은 분인 듯하다.
검소하면서도 7남매(딸 여섯, 아들 하나)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했다고 한다. 물건을 사도 7개를 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빠듯한 교사 월급에 쉽지 않았을 듯하다. 김혜영씨 말처럼 "엄마는 좀 힘들었"을 정도로, 가끔 이웃집에서 쌀을 빌린 때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김혜영씨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재우기까지 할 정도였다.
60~70년대 어렵던 시절이니 이해가 되면서도 어머니를 비롯해 식구들이 힘들었겠다 싶다. 교육자로서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힘썼다고 하니, 남다른 교육 철학을 지녔으며 아이들을 향한 관심 또한 깊었다.
아버지가 퇴임할 때 첫째 한빛이 태어났는데, 줄곧 아버지께서 한빛을 돌봐 주셨다고 한다. 유치원 등하원도 도맡아 하고, 좀 더 자라서는 거의 날마다 근처 학교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놀게 했단다. 아버지의 교육 철학이 담긴 돌봄이었을 테다. 교사로서 부모로서 보여 준 아버지의 모습이 교사로서 엄마로서 김혜영을 있게 했다고 한다. 김혜영씨도 두 아들을 될수록 동등하게 대하고, 믿고 존중해 주려고 했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열정 넘치게 일해 왔다. 국어 교사로서 갖춰야 할 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배우고 익혀 수업에 적용하려 애썼다. 교사 일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학생들 진학에서도 두드러진 결과가 나와 학교에서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삶이었다.
교사가 되고 3년쯤 뒤에는 교육대학원을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고3을 맡았을 때는 대학을 많이 보내 관리자들도 최고로 여겨 주었다. 끝내주는 김혜영, 괜찮은 교사. 이런 칭찬에 취해 스스로를 최고로 알던 시기였다. 교사에게 철학이 있어야 되는지도 몰랐고 열심히 가르치면 그게 교사인 줄 알았다고 한다.
남편도 국어 교사로 일하다 퇴임했는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났을까?
"저는 포천에서 국어 교사를 했는데,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에서 사물놀인가를 가르친대요. 이것도 국어 수업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갔죠. 그때 남편이 거기 모둠장이었어요."
"거기서 만났군요."
"그때 제가 29살 끝 무렵인데 당시로선 노처녀(?)였죠. 남편도 나이가 좀 있고 하니까 옆에서 사람들이 둘 사이를 부추긴 면도 있었고요."
"그래도 끌리는 면이 있으니까 결혼했겠죠?"
"되게 존경스러웠어요. 사랑도 했는데 존경했죠. 제가 볼 땐 정말 의식 있는 교사였어요. 같은 국어 교산데 내 자식이라면 저 사람한테 국어 배우는 게 낫겠다 생각했죠. 공부는 지식만으로 안 되고 가치관을 심어 줘야 하는데, 한빛 아빠는 저랑 달랐어요. 임용고시로 공부만 잘해서 교사 되는 게 좋은 게 아니에요."
과거 촌지를 받고 매를 들던 교사였던 그는 촌지를 안 받고 매를 내려놓으며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다. 남편과 전교조를 만나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남편이 육아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고 들었어요."
"그니까요. 남편이 '애는 여자가 낳지만 육아는 남편 몫'이래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애는 엄마가 키우는 거 아냐?' 했지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저러나 보다 했죠."
"전혀 안 그래요! ㅎㅎ"
남편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가난한 만큼 복잡한 집안 사정도 있었을 테고. 그런 남편에게 교사 김혜영은 큰 복으로 비쳤나 보다. 물론 남편이 전교조 해직 교사가 되고, 잦은 모임 등으로 미안한 마음을 육아로, 집안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책에도 남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을 교사가 보고 부모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쓰기도 했다. 육아를 분담하는 남편 이야기나 교사로서 부모로서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그대로 드러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목을 보고 하는 얘기일 테다.
내 아들인데 어떻게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질까
이쯤에서 책 얘기를 꺼냈다. 책은 어떻게 내게 되었을까? 아니, 글을 왜 썼을까? 짐작이 되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