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은 죽음의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매도하면서 김기설의 친구이자 전민련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그를 체포, 구속했다.
연합뉴스
검찰과 언론, 그리고 가짜 뉴스
'유서대필사건'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검찰의 문제이다. 검찰은 이 사건에서 정권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기획하고, 수사했고, 결과를 발표했다. 강기훈이 유서대필을 하지 않았다는 수많은 증거들은 검찰에 의해 무시되었고, 오직 검찰이 사실이라고 믿는, 아니 검찰의 기획에 따라 사실이 되어야 하는 것만을 모아 강기훈을 희대의 범죄자로 몰아갔다.
이러한 행태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의 보위와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필요에 따라 사건을 기획하고, 수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다. 이때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는 수많은 증거는 무시된다.
당시 언론 역시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유서대필사건'에서 언론은 정권과 검찰의 발표를 받아쓰기만을 했다. 그 결과 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했던 1991년 5월의 정국은 '자살을 방조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라는 프레임으로 전환되었다.
언론은 선정적 보도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호도했다. 이는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받아쓰기를 통해 지엽말단적인 문제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상업적 목표(구독률, 시청률 등)에 집중해 오직 속보 경쟁, 단독 경쟁만을 일삼는 현재 언론의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
1991년 5월에서 나타난 문제점 중에서 특별하게 지적해야 할 점은 가짜뉴스 문제다. 당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고 한 박홍 신부의 인터뷰는 지금 표현으로 하자면 전형적인 '가짜뉴스'였다. 특히 박홍 신부는 어둠의 세력이 북한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그의 말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발언이었으며, 어느 것 하나 사실로 드러난 게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진 바가 없었다. 자신의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사과조차 한 적이 없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다. 즉 가짜뉴스가 장삼이사들의 사적인 자리에서 유포된 것이 아니라, 대학교 총장이라는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 인터뷰라는 공적인 방식으로 생산, 유포된 것이었다.
오늘날 가짜뉴스는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그럴듯한 내용과 방식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박홍 신부의 경우처럼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있으면서 전혀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고 있다.
586세대와는 달랐던 1991년 세대의 트라우마
당시 국민들은 강경대의 죽음에 분노했지만, 박홍 신부의 발언과 '유서대필사건'에 대한 언론의 받아쓰기 이후 빠르게 식어갔다. 특히 6월 3일, 총리에 내정된 정원식 교수가 대학원 강의를 위해 외국어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대학생들이 항의의 표시로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사건이 터지면서 1991년 5월 투쟁은 국민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91년 5월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91년 5월 투쟁은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억되지 않는다. 아니 패배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386(현재의 586)세대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6월 항쟁에서 불과 4년이 흐른 뒤에 있었던 1991년 5월 투쟁은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피와 눈물로 거리를 메웠던 세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1991년 5월 투쟁은 아직 민주화 투쟁의 기록으로 공인되고 있지 못하기에 그 트라우마는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까지도 활발했던 학생운동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그 세력이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특히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사회 내에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전면화되면서 정치적 민주화 운동은 전체적으로 축소되어 갔다. 이러한 현실에서 5월 투쟁의 주역이던 세대들은 선배 세대인 386세대처럼 사회정치적 의미를 부여받는 세대로 성장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전개 과정이 이들의 트라우마를 더욱 내재화시켰을 것이다.
트라우마, 민주주의 실현 통해 집단적으로 극복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