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풍류의 중시조인 이두칠. 이두칠은 경아대 개관과 함께 이곳에서 인천풍류를 가르쳤다.
윤중강
인천풍류의 중시조(中始祖)인 이두칠(1901.11.11~1975.4.25)은 경아대 개관과 함께, 인천향제줄풍류(인천풍류)를 가르쳤다. 1920년부터 인천에 내려온 고유한 풍류는 정악이다. 정악은 1940년대에 들어서 점차 전승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두칠을 비롯한 몇 명이 인천풍류의 맥을 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풍류인들은 연주할 공간마저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인천정악원'을 만들고 인천풍류를 잇고자 했다. 1950년대에는 변변한 연습공간이 없어서 중구의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지만 인천풍류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1959년 '인천 향제 영산회상' 공연이 있었다. 당시 홍예문 아래 인천시민관 (현 인성여자고등학교)에서 스승 이두칠을 모시고, 제자 김응학이 함께 연주했다. 김응학은 일찍이 인천풍류의 맥을 잇고자 결심을 했고, 이두칠은 그를 수제자로 생각하면서 가르쳤다. 이런 그들이기에 경아대의 개관이 얼마나 기뻤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경아대가 개관하고 여기서 '인천풍류'의 전승이 이뤄졌다. 김응학(피리, 해금, 양금), 김소자(가야금, 양금) 김금식(가야금, 아쟁) 등이 악기를 익혔다. 그러나 젊은 그들에게, 매우 느리고 단순한 선율의 연주가 늘 재미있을 순 없었다.
때로는 연주를 하다 졸기도 했는데, 스승 이두칠은 어쩔 때는 제자들을 위해서 잠시 휴식을 주면서 주전부리의 시간을 종종 마련했다. 경아대 관련해 인터뷰를 하면서 김소자 선생이 구술한 내용을 보면 그 시절을 짐작하게 된다.
"응학아, 저기 나가서 찐옥수수 사와라."
스승 이두칠이 돈을 주면서 그렇게 말하면, 제자 김응학은 신이 나서 옥수수를 사왔다. 경아대가 세워지고, 이두칠은 제자에게 풍류를 가르쳤다. 옥수수를 먹고 나서 풍류를 할 땐, 배는 불러오고, 졸음은 더 몰려왔다. 그렇다고 풍류를 배우면서 졸 순 없었다. 인천풍류를 잇고자 하는 스승의 사랑과 열정이 제자들에게도 전해졌다. 인천풍류는 이두칠에서 김응학으로 이어졌다.
각 지역마다 시·도 지정문화재가 있다. 인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천은 백년의 역사를 지켜온 인천풍류(인천향제줄풍류)를 아직 문화재로 지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전승은 끊어질 위험에 놓여 있다.
인천의 풍류가 사라지게 둘 것인가
풍류의 대표곡은 '영산회상'으로, 이 곡은 지역(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 풍류는 경제(京制)와 향제(鄕制)로 크게 나뉜다. 경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풍류(정악)를 말하며, 국립국악원에서 그 전통을 잇고 있다.
향제는 지방마다 다르다. 예전엔 충청도는 충청도대로, 전라도는 전라도대로, 경상도는 경상도대로 그 지역의 풍류가 있었고, 그것은 조금씩 달랐다. 비교하면, 지방마다 토박이말(사투리)이 있는 것처럼, 그 지역 특유의 '향제풍류'가 있는 것이다. 사투리를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향제풍류도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현재 국가에서 인정한 '향제풍류'는 두 지역에서 전승됐다.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 83호 '향제줄풍류'는 구례향제줄풍류(83-1호)와 이리(익산)향제줄풍류(83-2호)가 있다. 인천에도 고유한 향제줄풍류가 있었다.
1920년 이우구락부가 조직되면서, 인천풍류의 전통은 확실하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인천에는 100년이 넘은 고유한 '인천에 의한, 인천을 위한, 인천의 풍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풍류가 인천에서는 존재조차 미미하고, 이런 상태로 계속된다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풍류는 혼자서 하는 음악이 아니고, 대여섯의 동호인들이 모여서 함께 연주하는 것인데,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 채 국악인들이 '인천풍류'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하다.
고인이 된 이두칠과 김응학이 보면 죽어서도 통탄할 일이다. 인천시에선 '백년가게'라고 해서 오래된 가게(노포) 운영을 장려하고 있다. 30-40년 된 가게들이다. 그런데 실제 백년을 넘긴 풍류음악에는 관심이 없다. 인천시에도 무형문화재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도 있을 터인데, 그들에겐 '인천풍류'는 중요하지 않을까?
인천의 풍류가 연주된 기록이 있다. 1937년 8월 15일, 당시 서울의 경성방송국(JODK) 프로그램을 재현해보자. 낮 12시가 되면 뉴스를 시작한다. 도쿄발 뉴스와 일기예보가 있은 후, 낮 12시 30분부터 조선뉴스를 20분간 소개한 뒤 12시 50분부터 음률(音律) 영산회상(靈山會相)이 30분간 연주됐다. 그 날 8명의 연주자는 현금(거문고) 윤영달, 가야금 민성기, 양금 오복모, 해금 김덕진, 대금 이두칠, 퉁소(단소) 강용운, 필률(피리) 이재규, 장고 김기풍이었다.
이날 경성방송국에서 이두칠을 중심으로 영산회상(인천풍류)를 제대로 갖춰서 연주를 했다. 이 연주가 생방송(라이브)였냐고? 맞다. 그렇다. 그 시절의 많은 음악프로그램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직접 연주했다. 라이브로 연주된 이후에는 '레코드 음악'란 이름으로, 실제 스튜디오 연주가 아닌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비록 훗날의 역사(광복절)이기는 하나, 마침 8월 15일 인천풍류가 전국에 방송을 통해 퍼져나갔다는 사실이 더욱 뿌듯하게 느껴진다. 반면 이렇게 인천풍류가 당시에는 널리 알려졌는데, 지금에는 너무도 홀대하는 생각이 들어서 평정심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된다.
같은 날 밤 8시에는 '가곡'이란 이름으로 역시 풍류음악이 방송됐다. 연주자로는 남창엔 이병성, 여창엔 이아량이 앞과 똑같이 30분을 연주했는데, 여기에 함께한 기악 연주가는 현금(거문고) 장인식, 가야금 김영윤, 양금 이복길(이주환), 필률(피리) 김보남, 대금 김계선, 해금 김천흥, 장고 김선득 등이다.
여기서 소개한 연주가들은 지금도 한국음악의 큰 별로 추앙을 받는 분이다. 훗날 인간문화재가 된 분도 있다.
나는 지금 배운 대로 연주하고 있다
인천은 서울과 매우 지리적으로 가깝다. 그러나 당시 인천풍류는 서울과 다르게 독특하게 자리를 잡았다. 인천인으로 구성된 고유한 풍류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조양구락부'나 '이왕직아악부'와는 다르게, 인천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풍류단체가 존재했다. 인천은 이런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해방 후 이두칠을 중심으로 '인천풍류'의 전통이 이어졌으며, 그 계보를 확실하게 이은 것이 김응학이다.
김응학이 이어온 인천풍류는 '경기줄풍류' '인천향제줄풍류'라는 이름으로 꾸준하게 계승됐다. 그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제자들을 길러내기에 애를 썼고, 풍류에 관한 논문을 쓰는 젊은 연구자들이 찾아오면 인천풍류를 소상히 알려주기에 힘을 기울였다.
김응학에게는 전해오는 일화가 하나가 있다. 그가 인천지역의 무형문화재로 추천돼 전문가의 심사를 받았다. 그의 연주를 듣고 한 심사위원이 어떤 부분이 이상하고 틀렸다는 듯이 얘기를 했다. 김응학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스승(이두칠)에게 배운 것은 이렇고, 나는 지금 배운 대로 연주하고 있다고.
그 심사위원이 한심스럽다. 인천을 기반으로 해서 지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풍류(영산회상)의 기준치는 국립국악원 또는 서울인 셈이었다.
향제 줄풍류는 그 이름처럼 한 지역의 고유하게 전돼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오히려 '다름의 미학'이 그 가치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치 그 심사위원은 어떤 지역사람이 토박이말(사투리)를 쓰고 있는데, 그게 서울말(표준어)가 아니라서 틀렸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모양새다.
김응학은 이후로 자신이 보유한 '인천향제줄풍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포기했고, 매우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
인천풍류(인천향제줄풍류)는 지금처럼 인천의 무형문화재의 변방에만 존재해선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인천에서 김응학과 같은 불이익으로 점철된 비운의 예술가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1964년 6월 16일, 인천의 보각사(보각선원)에서 인천풍류가 연주됐다. 여기서는 찬불예악(讚佛禮樂)이라고 했다. 풍류의 대표곡 '영산회상'은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아대에 인천풍류를 하는 사람들이 보각사로 자리를 옮겼다.
대금의 이두칠을 중심으로, 아쟁의 이문기, 거문고의 김영권이 함께했다. 여기에 당시 젊은 국악인 가야금의 김금식, 단소의 이상헌과 함께, 김응학은 양금을 연주했다. 법당에서 낭랑하게 퍼졌을 김응학의 양금소리가 오늘따라 더욱더 귀하면서도 아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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