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인 지수당양반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 세운 정자로서 근처에는 입신양면의 대명사인 서흔남의 묘비도 함께 있다.
운민
이 서흔남이란 사람은 당시 신분제 사회가 엄격했던 조선사회에서 입지적인 인물로 그의 일화를 보면 영화의 소재로 삼아도 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서흔남은 원래 남한산성 서문 밖에서 태어난 사노비로 기와 잇기와 대장장이, 장사꾼 등으로 생계를 꾸려갔었다. 아마 서흔남에게 병자호란이란 재난이 있지 않았다면 평범한 노비로 살다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호란이 터지고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하면서 성 안팎의 소식이 끊기자 전령을 자처하면서 그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난다.
왕이 적은 유지를 노끈으로 꼬아 옷으로 얽어매고 거지와 병자 행세를 하며 적진을 지나간 것이다. 청나라 군사가 거지인 줄 알고 먹을 것을 던져주자 서흔남은 더욱 실감 난 연기를 위하여 일부러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 먹고 그 자리에서 대변을 보는 등의 행동으로 청나라 군인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서흔남은 무릎으로 기어서 적진을 빠져나온 뒤 화살같이 달려가 전국에 이를 전했다. 이후 수차례 성 밖을 왕래하며 왕명을 전하였고, 적진에 들어가 첩자의 역할을 하는 등 공로가 어느 장군 못지않다. 그밖에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잘 걷지 못하자 등에 메고 성 안으로 들어가 하사품으로 왕이 입던 곤룡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의 공으로 천민신분을 벗고 그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정 2품 당상관인 훈련 주부와 가 의대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죽으면서 인조에게 받은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남한산성 아래 병풍산 기슭에 묻혔다. 그래서 그의 무덤을 일컫어 곤룡포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묘비가 지수당 기슭으로 옮겨진 까닭은 조금 기구하다.
수십 년 전에 후손이 그의 무덤을 처분하고 묘를 이장하면서 앞에 서 있던 묘비는 남기고, 광주문화원에서 묘비를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묘비를 보면서 우리가 잘 몰랐던 서흔남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해주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본다.
이제 다시 로터리 방면으로 돌아와서 행궁을 바라보고 그 옆에 있는 인화관이란 건물로 길을 재촉해 본다. 바로 옆에 있는 규모가 거대한 행궁의 위엄에 가려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엔 남한산성을 찾아온 고위 관료를 위한 숙소인 객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니 그 중요성이 결코 덜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시절 인화관은 허물어졌으나 2014년 남한산성 행궁과 함께 복원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화관에선 팬데믹 이전에는 수많은 전통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로 유명했다.
판소리, 창극, 국악 등 인화관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공연은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현재는 텅 빈 정막만이 건물을 감돌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공연이 시작되어 사람들로 북적이길 바라본다. 남한산성은 그 역사적 중요성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제 행궁으로 이동하며 남한산성의 탐험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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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팟케스트 <여기저기거기>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obs라디오<굿모닝obs>고정출연, 경기별곡 시리즈 3권, 인조이홍콩의 저자입니다.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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