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포에 도달한 내성천은 350도를 돌아 다시 반대로 180도 꺾여 하류 쪽 삼강주막으로 향한다. 멀리 뽕뽕다리가 보인다.
전갑남
참 신비스러운 물줄기이다. 강물은 급할 것도 없이 유유히 흐른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없이 평화로움을 느낄 것 같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물줄기가 뿜어내는 수려함에서 서두를 것 없는 여유가 느껴진다. 신비가 있는 곡선의 강, 그저 흐르는데도 아름다움이 있다.
넋을 잃고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일행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시물이란 말 들어봤어?"
"시물이요? 처음 듣는데요."
"시물은 말이야, 경상도에서 세 번의 물이라는 뜻이지!"
"시물이 회룡포와 무슨 연관이라도?"
"물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알지? 그에 얽힌 슬픈 역사가 여기 녹아있지!"
회룡포와 마의태자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끄집어낸다.
천년사직 신라가 고려 왕건의 손에 넘어가자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려받을 왕위를 눈앞에 두고서 영원히 떠나야만 했던 태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이쪽 마을에서 건넛마을을 갈 때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세 번씩이나 건너야 했다. 이 '세 번의 물'이 경상도 사투리로 '시물'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떼놓은 당상인 왕의 자리에 못 오르고, 예천군 지보면 마산리에서 강 건넛마을 용궁면 무이리로 가는 십리 길의 내성천을 세 번이나 강을 건넜다. 걸음걸음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물을 건너며 그는 참았던 통한의 눈물이 쏟았다고 전한다.
마의태자는 내성천을 건너 문경으로 향했고, 하늘재를 넘어 충주 상모면 미륵리로 갔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흘린 눈물을 담은 회룡포 강물은 여전히 350도를 휘돌아가고 있다. 어떤 여행작가는 회룡포는 딱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지형인데, 남은 10도가 산줄기로 이어져 섬이 되는 것을 막았다고 표현했다. 실제 눈앞에서 보니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백사장을 따라 심은 나무도 둥근 곡선을 따라 심어졌다. 회룡포 마을 앞 논밭도 참 정겹다. 오른편으로 펼쳐진 숲이 울창하다.
강이 흐르는 길목에서
회룡포라는 지명의 유래가 궁금하다. 아마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물을 휘감아 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리라.
그런데 이곳 주변에는 유독 용(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용궁면이 그렇고 장안사가 있는 비룡산, 또 와룡산, 용포, 용두소, 용두지 등이 그렇다. 전설 속의 용이 이곳에서 승천이라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 마을은 1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개간하면서 경주 김(金)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홉 가구가 사는데, 모두 경주 김씨다. 신라가 멸망하면서 같은 김씨인 마의태자가 지나간 곳에 경주 김씨 가문(家門)이 들어선 게 우연찮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