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리 공동묘지에서 부역 혐의로 학살된 박병칠
박만순
뒷결박 지은 새끼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박병칠(당시 27세)은 죽을힘을 써가며 새끼줄을 푸는 데 집중했다. '여기 있다가는 개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밤중 곡물 창고 안은 캄캄했다. 바로 옆 사람도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어떤 이는 코를 골았고, "어머니, 살려 주세요"라는 잠꼬대도 들려왔다.
창고에는 백수십 명의 사람이 갇혀 있었는데, 온갖 악취가 진동했다. 한여름에 성인 남성 백여 명이 갇혀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씻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고, 심지어 대·소변도 창고 안 화장실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 창고 안은 악취와 가스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한 시간여 실강이를 벌인 박병칠은 까치발을 하고 화장실로 갔다. 누가 깰새라 숨을 죽인 채 화장실 창문을 뜯어냈다. 십여 분 후 간신히 창문을 빠져나온 박병칠이 두 발을 땅에 디디자 시원한 바람이 목줄기를 훑고 갔다. '이제는 살았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일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의 어느 날 밤 일이었다.
"여기 있으면 우리 가족 다 죽어요"
새벽에 곡물창고를 탈출한 박병칠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하지만 부역 혐의로 붙잡힌 그가 집에 갈 수는 없었다. 그는 둘째 처형이 사는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로 향했다. 태안경찰서에서 20리(8km) 거리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해가 뜨기 전에 닿아야 했기에 박병칠은 뛰었다 쉬었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한 시간이 채 안 돼 처형 집 싸리문을 열었다. 새벽에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온 그에게 처형은 "제부, 어쩐 일이래요"라며 반가워했다. "예, 처형"이라고 운을 뗀 그는 태안경찰서에 연행됐다 탈출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처형의 안색이 변했지만 그도 동생 남편을 매몰차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흘째 날. 결국 박병칠의 처형이 입을 열었다. "제부, 서운해하지 말고 제 말 들어보세요." 그는 처형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었다.
"여기 있으면 우리 가족 다 죽어요. 죄송하지만 나가 주세요."
"...."
1950년 10월 한국전쟁 중 부역혐의자 색출 작업은 매서웠다. 아무리 동기간이라 하더라도 빨갱이로 찍힌 사람을 숨겨주었다가는 똑같이 빨갱이 대접을 받았다. 숨겨준 사람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처형 집을 나온 박병칠은 막막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가 살고 있는 태안면 반곡리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형님 댁으로 정했다. 그는 밤에 40리(16km) 길을 걸어 태안군 남면(현재 태안군 남면) 당암리 형에게 갔다. 형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기에 동생을 쉽게 내쫓지 못할 거라고 박병칠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부모는 박병칠을 환대했지만, 형수는 달랐다. "서방님,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예요? 다른 곳으로 가세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박병칠은 '부모형제도 소용이 없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하지만 형수 입장도 이해는 갔다. 자기가 형수였어도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이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박병칠은 결국 자기 집으로 향했다.
꿈에 나타난 외삼촌
박병칠이 태안면 반곡리 집 싸리문 앞에 섰는데 "으앙"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아내 이남숙은 "앗! 민교 아버지"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남숙의 팔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박병칠이 치안대에 연행되었을 때 이남숙은 만삭이었다. 그가 도피하는 사이 딸이 태어났다. 며칠 만에 만난 박병칠 부부는 수십 년 동안 이별했던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박병칠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다.
이남숙은 남편을 다락에 숨겼다. 다락 밑으로 빨래줄을 걸고, 거기에 기저귀를 널었다. 긴장과 초조함의 날이 지나고 치안대원 조민수(가명)가 일행과 함께 박병칠 집에 왔다. 조씨는 "경찰서에서 병칠이를 잡아 오라고 시켰구만이라우"라며 건넌방에서 보초를 섰다. 이남숙은 치안대원들에게 찐 고구마를 건넸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다음날로 박병칠은 이장 집으로 가 자수했다. 가족들이 피해를 볼까 봐 걱정도 됐고 무엇보다 살얼음판 같은 그 상태를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자수한 박병칠은 얼마 후 태안면 장산리 야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이남숙은 답답하기만 했다. 밥도 먹을 수 없었고, 그 탓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아기는 악을 쓰며 울어댔다.
며칠 후 박병칠의 외삼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병칠이가 장산 공동묘지에서 죽었단다. 얼릉 일어나서 가보자"라며 남숙의 팔을 이끌었다. 이남숙은 "뭐라구요?"라고 대꾸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날 수 없었다. 잠시 후 눈을 뜨니 꿈이었다.
꿈에서 깬 이남숙은 시아주버니와 집안 어른들과 함께 장산공동묘지에 갔다. 그곳에는 10여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박병칠은 목에 총을 맞고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또 다른 탄두가 오른쪽 귀밑을 관통해 입이 왼쪽 귀밑까지 돌아가 있었다. 입에서 흐른 검붉은 피는 땅을 적시고도 남았다.
박병남은 죽은 동생 박병칠의 뒷결박을 풀고 준비해간 이불 홑청으로 시신을 감쌌다. 경황이 없어 근처에 구덩이를 파 가매장을 했다. 4년 후에야 박병칠의 시신은 정식으로 매장됐다. 그가 피신 중일 때 태어난 딸은 1년도 안 되어 죽었다. 딸은 이름도 없었다. 아버지가 학살 당한 직후라 딸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950년 9월 말 도롱이 입은 불청객들이 박병칠 집 싸리문을 열었다. "계시우?" 안방에서 자던 박병칠이 문을 열자 불청객들은 달려들어 주인장의 손을 뒷결박지었다. 그 소란에 곧 태어날 아기의 쌈저고리(배냇저고리)를 만들던 아내 이남숙과 건넌방에 있던 박병칠의 어머니, 아들 박민교(1946년생)는 깜짝 놀랐다.
박병칠은 이진수(가명)네 사랑채로 끌려갔다. 마을 치안대원과 경찰들이 "회의에 참석했던 놈이 누구야?"라며 북한 인민군이 주둔하던 인공 시절 활동을 물었다. 박병칠은 회의에 몇 차례 참석했다는 이유로 '적극 가담자'로 둔갑했다.
이후 이남숙과 아들 박민교가 박병칠을 만나러 갔다. 박병칠은 추녀 아래에서 쪼그려 앉아있지만 총과 죽창을 든 치안대원들 앞이라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잠시 후 한 치안대원이 추녀 밑에 있던 사람 하나를 불러내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집 앞에 있던 방죽샘에 집어넣었다. "살려 주시오"라는 애처로운 외침은 금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이후 열흘간 도망을 다닌 박병칠은 결국 자수를 했고 영영 가족을 볼 수 없게 됐다.
박병칠은 일제강점기에 인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이후 일본군으로 끌려간 그는 운전병으로 있다가 휴가차 조선에 들어와 이남숙과 결혼했다. 해방 후에는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서산군 태안면 반곡리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6.25가 났고, 부역 혐의로 불귀의 객이 됐다.
경찰 자료 믿을 수 없다는 사법부
"신원기록 심사보고에 망인(亡人)들이 처형된 자로 기재된 것은 인정되나(중략), 망인들을 (부역혐의 학살사건)희생자로 확인하게 된 원시자료에 대한 언급이 없어, 희생자로 단정하기 어렵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4년 1월 15일 <2011가합127633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