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실수를 반복하는 나란 인간. 어쩌나...
남희한
항공기엔 블랙박스라는 아주 중요한 장치가 있다. 운행 중에 발생한 대부분의 이벤트를 기록하는 장치로, 사고 시 상황 정보를 유지함으로써 비행 중 상황을 재현해 원인을 규명하는데 쓰인다. 사고가 나면 생존자가 있기 어려운 이유로 아주 튼튼하게 만든 기록 장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추락사고가 발생했던 1950년대에 개발되어 60년대에 장착이 의무화된 블랙박스는 많은 사건 사고에서 원인을 규명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에 달리는 블랙박스가 이를 차용한 대표적인 사례인데, 교통사고를 당해본 사람들은 이의 유용함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다.
하지만 항공기에서의 블랙박스는 아주 중요한 목적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바로 사고의 재발 방지다.
"항공 분야의 모든 지식, 규칙, 절차는 누군가 어디선가 추락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 널리 알려진 설리 기장의 말마따나, 매번의 추락은 미래의 비행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의 갖가지 비행술은 지난 사고로부터의 배움인 거다.
그러니까 블랙박스는 원인 규명과 함께 이를 분석하여 다음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더 큰 목적을 가진다. 동일한 사고로 또 다른 안타까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고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개선하기 위함이다.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노력. 그 노력의 결실이 블랙박스라고 불리는 비행 기록 장치이다.
주식 투자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투자일지다. 매매뿐만 아니라 그 이유와 계획을 적어두는 투자의 기록. 이 기록을 통해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한 판단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어이없는 짓을 반복하는 내겐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노력, 투자일지가 필요했다.
항공업계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블랙박스의 중요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식 투자에 있어 블랙박스 역할을 하는 것이 투자일지라는 것도. 그럼에도 실천하지 않은 것은 '예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뭐 달라지겠냐는 생각은 지나치게 가벼워 생각 속에 제대로 내려앉은 적이 없었다.
투자일지를 권유하던 많은 사람들의 얘기에도 그 효과를 모르니 귀찮음이 앞섰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질문과 "매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대답이 결국 나를 책상으로 이끌었고 떠밀리 듯 몇 자라도 끄적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별 기대 없던 기록의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느낌으로 움직였던 탓에 거래 내역을 봐도 무슨 연유로 사고팔았는지 몰랐던 종목들이 제법 분명하게 제 역할과 스토리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기록은 지난 내 결정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 아직도 유효한지에 대한 판단을 가능케 했다. 기억의 왜곡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라 의지할 것이 못되지만, 기록은 '빼박'이란 기본 속성으로 가당찮은 '과오의 미화'까지 차단했다.
별 기대 없던 기록의 효과
내가 쓰는 투자일지란 것이 거창한 것은 아니다. 꼼꼼하지도 않고 매번 적지도 않는다. 그저 이 종목이 좋아 보인다. 이유는 이렇다. 얼마 정도 사야겠다. 정도의 투자 아이디어를 적은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이 다다. 간혹 관심이 커지거나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참고용으로 내용을 보충하기도 하지만, 되도록 간략히 하려고 한다. 공을 들인 완벽함이 아니라 대충이라도 꾸준함이 목표이기에 그렇다.
이전엔 절대 이길 수 없었던 날뛰던 마음을 차분해진 머리가 거뜬히 제압했다. 실로 편안한 상태. 이게 중요하다. 언제나 이성이 갈피를 못 잡고 마음을 따를 때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투자일지를 적고 난 후부터 원치 않게 제자리를 맴돌거나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일이 줄었다. 내 앞에 '글'이라는 형태로 드러나 있는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이 방황할 여지를 많이 줄여 준 덕분이다.
잘못된 길을 갈 수는 있다. 사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잘못된 길이 더 많은 미로를 헤매고 있더라도 언제든 온 길을 되짚어 돌아나올 수만 있다면 내딛는 발걸음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테다. 잘못되었을 때 어디 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든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