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계절마다 옷장을 정리할 때면 만만치 않은 옷의 양과 무게에 놀라곤 하지만, 이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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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땐 입고 있는 옷이 자신감으로 대변되던 시절이었던 거 같다. 월급날이면 백화점으로 달려가 마네킹이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빼오는 재미도 쏠쏠했다. 회사에선 유니폼을 입었지만 출퇴근 길에 멋진 옷으로 치장을 하고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는 내 모습을 유리창을 통해 힐끗 지켜보는 일은 왠지 신이 났었다.
"아이고 야이야, 무슨 옷을 그래 사대~쌓노. 옷 못 입어가 죽은 귀신이 붙었나?"
쇼핑백을 들고 한껏 들떠 귀가하는 나를 보며, 엄마가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는 횟수도 점점 더 늘어만 갔다. 하지만 이런 뼈 있는 말도 '옷'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라앉힐 순 없었던가 보다.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지 못하는 이상한 습관 때문에 옷은 눈 깜짝할 새 부지기수로 늘어나 있기 십상이었으니. 그래 부정하진 않겠다. 예전부터 옷을 그 어떤 이보다 그것도 많이 좋아하긴 했다. 차림새가 맘에 들어야 외출을 했고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세팅해 놓는 것으로 하루의 마침표를 찍곤 했으므로.
하지만 지난날들의 쇼핑엔 분명한 법칙이 존재했다. 목적에 걸맞지 않은 충동적인 옷 구매는 잘하지 않았다. 구입의 상한선과 목적성을 분명히 해 두었고, 분기별 의류 구매로 발생한 비용을 결산해서 명문화시켜 놓기도 했다. 그만큼 나름의 법칙을 잘 지켜온 덕에, 옷장이 차고 넘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옷 총량의 법칙
- 옷장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옷을 사지는 않는다.
- 두 해 이상 손이 가지 않은 옷은 과감히 정리해 버린다.
- 옷을 하나 사면, 필요 없는 옷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다(될 수 있으면 찾아서 하나를 버린다).
나름 정해둔 이 '옷 총량의 법칙' 덕에, 옷을 좋아하고 가진 옷들을 멋있게 코디해서 입기를 좋아한 나의 옷장은 그럭저럭 흉하지 않을 정도로, 차 있다가 빠지기를 반복하는 바닷물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고, 생존해 나갈 수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지난 2년여의 상황은 전혀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유일무이하고 귀한 내 옷장이.
뒤죽박죽, 색깔과 재질이 무시된 채 옷장에 걸려있는 옷들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옷장 밖에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심지어 언제 산지도 모르는 옷들이 여기저기 박스에 질서 없이 들어 있었다. 정해놓은 옷 정리의 법칙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나의 지난 시간들이 옷들과 함께 출구가 어딘지도 모른 채 쌓여 신음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2년, 어디서부터 시작돼 자라난 것인지 모를 불안이 내 시간을 좀 먹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불가항력의 순간이 자꾸 생겨나더니 밤이면 무거운 돌덩이가 온몸을 짓누르며 숨을 자주 막히게 했다. 책을 펼쳐 들면 활자들은 제각각 다른 박자로 춤을 추고 있었고, 아이에게 혹여나 안정적이지 못한 목소리가 들킬까 전화통화를 최대한 자제하기도 했다.
몰라보게 살이 내리고 하루에 한 끼의 식사도 못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생활은 곧 쇼핑으로 치환됐다. 밤이면 밤마다 내 손은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매일 새로운 옷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고, 다음 날이면 모인 옷들을 페이로 결제했다. 불안이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현관 앞에 쌓이는 택배 상자도 늘어났다. 가끔은 오래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있기도 했다.
옷장 속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를 단 채 가득 차 있던 그 옷들은, 내 외로움이었다. 한숨이었고, 눈물 자국 선명한 우울이었다. 특히 일을 그만두고 불안이 야금야금 일상을 잠식하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빈 둥지 증후군과 약간의 공황 증세를 느끼며 매일을 견디던 날들 속에서 옷들은 내 외로움과 함께 배달됐고 두려움과 더불어 제 쓸모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채울수록 텅 빈 공허가 사방을 벽처럼 에워싸기 시작한 걸 왜 진즉 눈치채지 못했을까? 코로나 19로 인해 외출 시간이 더욱 줄어들어, 제 소용을 다하지 못한 옷들이 여기저기서 구출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나는 왜 짐짓 외면하고 있었을까.
산처럼 쌓여 있는 옷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 중, 제법 쓸 만한 것들은 따로 분류해 누군가를 위한 선물용으로 남겨두고 올 여름, 나를 좋은 곳으로 데리고 다녀줄 옷들만 선별해 옷걸이에 걸어본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색상과 재질별로 분류를 해 놓고 나니 맘이 한껏 가벼워진다.
옷장의 옷들을 끄집어내 정리하며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 시간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묵은 그때들도 함께 벗겨내고 닦는다. 계절별로 용도와 장소에 알맞은 옷 몇 벌만 있으면 만족한다는 '실용주의자'는 결코 될 수 없겠지만, 입지도 않을 옷을 의지와 상관없이 구입하는 일은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독한 외로움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는 걸 내 옷들은 온 힘을 다해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옷장이 환해지니 내게 주어진 시간의 등불들도 일제히 재점화된다.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위해 멋진 옷 한 벌을 골라 입고, 우아한 모습으로 뒤늦은 약속을 건네야겠다. 나 이제,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어느 때보다 잘~ 살아갈 거라고, 어쩌면 골라 입은 새 옷처럼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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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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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쌓인 옷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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