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맨 오른쪽)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NARA / 눈빛출판사
당시 신문 보도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김구와 이승만에 관한 기사인 1948년 2월 11일 치 <경향신문> '김구씨 의견을 돌변'은 AP통신 보도를 인용해 "당초 양씨(兩氏)는 조속한 독립 급(及, 및) 미·소 양군의 철퇴에 찬성하였으나, 그러나 소련이 북조선 군대를 건설하고 양(兩) 점령군대가 철퇴하는 경우에는 북조선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용이히 남조선을 접수하리라는 것이 명백히 되자 이 박사와 김구 양씨는 태도를 변경"했다고 보도했다.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김구·이승만의 입장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미·소 두 군대가 '양 점령군대'로 지칭됐다.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의 최대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송진우 총무는 1945년 12월 21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한 정견 방송에서 '점령'이란 용어를 썼다. 다음날 <조선일보> 기사 '민족의 균등한 생성 발전'에 실린 방송 연설문에 따르면, 송진우는 한민당의 입장을 이렇게 천명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기(期, 기약)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이탈하엿지마는 아직 자주독립이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북위 삼십팔도를 계선(界線, 경계)으로 그 이북은 소군(蘇軍)이, 그 이남은 미군이 보장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로바삐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야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므로써 완전한 독립국가로 승인을 밧지 안흐면 안이 되겠습니다.
송진우는 미소 두 군대가 일본의 항복을 보장받기 위한 보장 점령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미군이 38도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했다는 것은 이념적 억측의 결과가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당시의 다른 정치인들도 다 그랬지만, '미군 점령군'을 특히 많이 언급한 정치인이 있었다. 친미 정치인의 선두주자, 이승만이다. 위의 <경향신문> 기사에도 그가 백범 김구와 함께 미군 점령을 운운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승만이 '점령' 용어를 쓴 다른 사례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당시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그런 언급을 자주 했다. 일례로, 1947년 2월 21일 치 <조선일보> '남조선에 임정 수립 요망'에 따르면,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재차 촉구하면서 "남조선과도정부에 대하여는 점령 기타 중요 문제에 관하여 소련 급(及) 미국과 교섭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촉구했다. 미군정 하의 한국인 기관인 남조선과도정부가 '점령' 문제를 놓고 미국과 교섭할 권리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는 미군정이 끝난 뒤에도 '미군 점령군' 발언을 계속했다. 1949년 5월 18일 치 <동아일보> '한국 방위 서약 요구'에 따르면, 미국을 겨냥한 담화에서 미국이 한국을 책임져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남한을 미국이, 북한을 소련이 점령하여 한국을 분할한 것은 한국이 알지도 못하게 양국 간에 행하여진 것이오. 이 분할의 책임을 양국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며, 자연 미국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우리들을 계속 원조할 것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를 비평하려는 정신에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한·미 양국민의 상호의 입장을 서로 정당히 이해시키고저 말한 것이다.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고 미군은 남한을 점령했다'는 점은 해방 당시의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보수 친미파인 이승만도 대수롭지 않게 '미군 점령군'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는 '미군이 우리를 점령했으니 책임져라'는 위와 같은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역사적 사실일 뿐인데도... 공격 또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