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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결기 보인 삼례집회와 복합상소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17] 조정은 끝내 동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등록 2021.07.08 18:44수정 2021.07.0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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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상 달성공원내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상

최제우 상 달성공원내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상 ⓒ 김환대

 
1892년 11월 1일, 충청도 삼례에서 거대한 민중집회가 열렸다.

최시형의 뜻에 따라 가을걷이가 끝난 뒤의 집회여서 인근의 동학도는 물론 전국 각지의 책임자들이 모이고 일반 백성들도 참여하여 수 천명에서 1만여 명이 모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당한 교조의 죄명을 벗기고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포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도인들과 왕조체제에서 억울하고 수탈당하며 살아온 백성들이 자진해서 참여한 것이다. 

최시형은 교조의 신원을 통해 동학의 합법성을 쟁취하고, 만인평등ㆍ시천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삼례집회에 무척 공을 들였다. 삼례집회는 손천민을 상소대표자로 삼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두 가지를 청원하였다. 

하나는 유교는 공자의 유학이 아닌 종교로 인정하고, 탄압이 심하던 천주교, 야소교(예수교)도 인정하면서 동학만 배격탄압하는가, 둘째는 서리와 포졸들이 선량한 도인들을 탄압ㆍ살상하는 비인도성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교조의 신원과 교단의 자유를 거듭 요구하였다. 조병식과 이경직은 동학의 공인은 정부가 결정할 일이나 부당한 탄압은 없애겠다고 약속하였다. 지도부는 이 약속을 믿고 평화리에 군중을 해산시켰다.

삼례집회는 정부가 ' 교조신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 선비ㆍ유생들이 '이단'으로 몰아치는 상소가 잇따랐지만, 이제껏 지하에 묻혀 있던 동학 자체로서는 큰 성과를 거둔 행사가 되었다. 


단순한 신원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삼례의 모임은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성패에 관계없이 중요한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하여 동학운동사상 최초의 '정치 집회'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이다. 종교는 대중의 정치집단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삼례의 신원운동은 동학의 그와 같은 정치집단화 과정의 서막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석 4)
 
동학의 창시자와 계승자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동학의 창시자와 계승자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 이병길

 
동학 내부에는 낡은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후천개벽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중을 동원해서라도 창도정신을 실천해야 한다는 급진파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먼저 교조신원을 관철하고 합법적인 신앙생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비폭력 온건파로 갈렸다.

전자는 서인주ㆍ서병학의 계열이고 후자는 최시형을 비롯하여 김연국ㆍ손천민 등이다. 최시형은 우선 교단의 전통을 보전하면서 힘을 길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동학을 무시한 채 이단시하는 정부의 태도에서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최시형과 동학지도부는 1883년 3월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적인 집회를 통해 교조신원을 직접 정부에 건의하는 복합상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부가 이 무렵 왕세자 탄신일을 맞아 별시(別試)를 치르도록 하여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상경할 것에 착안한 것이다. 동학 간부들도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처럼 차림하고 서울로 오도록 하였다. 

상경한 동학교도 수 천명은 서울(한성) 인근에 머물고 지도부 50여 명이 3월 28일 오전부터 광화문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리기로 했다. 최시형은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다. 서울의 3월 하순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 추운 계절이다. 상소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도(吾道)는 동에서 받아 동에서 펴는지라. 어찌 가히 서로써 이름 하리오. 하니 이가 동학으로써 득명(得名)한 바요 신등(臣等)이 종사한 바니 두렵건대 동학을 가리켜 서학으로써 공격하지 말고, 동포를 몰아 이단으로 배격하지 않는 것이 가하거늘 도신수재(道臣守宰)는 민초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고 향간토호는 도인 대하기를 화천(貨泉)과 같이 하여… 이 도는…과시(果是) 만세에 무폐(無弊)하고 천하에 무극(无極)의 잘못에 범함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 부모는 화육중(化育中) 적자(赤子)를 극휼(亟恤)하여 써 선사(先師)의 지원(至冤)을 풀게 하며 신등 사명(死命)을 건져 주소서. (주석 5)

최시형의 뜻에 따라 손병희와 박광호ㆍ순천민ㆍ박인호 등이 대표가 되어 올린 상소는 지극히 온건한 내용이고 방법도 관행처럼 돼 있는 복합상소인데도 조정은 여전히 이단시하고 배척하였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왕실의 관리가 나타나 고종의 전교를 전했다.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업에 임하라. 그러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 주리라"는 말 한마디 뿐이었다. 

교도들이 이를 믿고 해산하자 조정은 약속과는 달리 동학을 더욱 거세게 탄압했다. 상경했던 교도들은 귀가할 수가 없었다. 관헌들이 체포하려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끝내 동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주석
4> 앞의 책, 130~131쪽.
5> 오지영, 『동학사』, 78~80쪽(발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 #최시형평전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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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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