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상달성공원내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상
김환대
1892년 11월 1일, 충청도 삼례에서 거대한 민중집회가 열렸다.
최시형의 뜻에 따라 가을걷이가 끝난 뒤의 집회여서 인근의 동학도는 물론 전국 각지의 책임자들이 모이고 일반 백성들도 참여하여 수 천명에서 1만여 명이 모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당한 교조의 죄명을 벗기고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포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도인들과 왕조체제에서 억울하고 수탈당하며 살아온 백성들이 자진해서 참여한 것이다.
최시형은 교조의 신원을 통해 동학의 합법성을 쟁취하고, 만인평등ㆍ시천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삼례집회에 무척 공을 들였다. 삼례집회는 손천민을 상소대표자로 삼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두 가지를 청원하였다.
하나는 유교는 공자의 유학이 아닌 종교로 인정하고, 탄압이 심하던 천주교, 야소교(예수교)도 인정하면서 동학만 배격탄압하는가, 둘째는 서리와 포졸들이 선량한 도인들을 탄압ㆍ살상하는 비인도성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교조의 신원과 교단의 자유를 거듭 요구하였다. 조병식과 이경직은 동학의 공인은 정부가 결정할 일이나 부당한 탄압은 없애겠다고 약속하였다. 지도부는 이 약속을 믿고 평화리에 군중을 해산시켰다.
삼례집회는 정부가 ' 교조신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 선비ㆍ유생들이 '이단'으로 몰아치는 상소가 잇따랐지만, 이제껏 지하에 묻혀 있던 동학 자체로서는 큰 성과를 거둔 행사가 되었다.
단순한 신원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삼례의 모임은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성패에 관계없이 중요한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하여 동학운동사상 최초의 '정치 집회'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이다. 종교는 대중의 정치집단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삼례의 신원운동은 동학의 그와 같은 정치집단화 과정의 서막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