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코로나19 교육 분야 대응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2021년 6월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2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발표하며 코로나19로 인한 등교 축소로 지난해 교과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학년과 과목에 따라 많게는 갑절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학업성취도 평가는 학생들이 국가 교육과정의 교육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으로, 매년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약 3%(지난해 2만 1179명)를 대상으로 실시된다.
마치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머지않은 미래에 대부분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며 공포감을 조성했던 2016년 다보스포럼이 떠오른다.
인류는 제4차 산업혁명을 통해 드디어 농경에서 시작된 고단한 노동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해 노동을 해 주겠다는데 그게 과연 호들갑을 떨 일일까?
정부는 부동산 경기를 억제하거나 부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는 경우가 잦다. 그때마다 궁금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부동산을 보유하지 못한 국민을 위한 것일까?
코로나로 인해 기초학력이 저하되었다며 교육의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다. 학력은 기성세대, 그중에서도 교육전문가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존재 이유일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자신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교육의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자처하려면 학력 저하를 걱정하기 전에 학력이라는 것이 아이들의 행복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과거와 다른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와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는 학력을 기준으로 교육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의심해 보고자 한다.
2. 평균의 종말과 총량의 법칙
학력이 학생 개개인이 아니라, 국가라는 심리 공동체와 그 속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소수의 누군가에게 유리한 기준일 수 있다는 도발적 의심을 제기하는 근거로 '토드 로즈'와 '다이엘 페낙' 만한 사례가 또 있을까?
현재 하버드 교육대학원 교수인 토드 로즈는 중학교 때 ADHD 장애 판정을 받은 뒤 성적 미달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대학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통과해 지역대학에 입학한 후 주경야독한 끝에 하버드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인간발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토드 로즈는 <평균의 종말>을 통해 평균이라는 허상이 어떻게 교육을 속여 왔는지 고발했다.
최초의 평균은 천문학자인 '아돌프 케틀레'가 매번 다르게 측정되는 지구와 행성 간의 거리를 발표하기 위해 도입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은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굴절된다. 이후 평균은 영국의 귀족 '프랜시스 골턴'에 의해 우월과 열등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에드워드 손다이크'에 의해 학생들을 등급으로 나누는 근거가 되어 지금까지도 교육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다.
교사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 '다니엘 페낙'은 어린 시절 알파벳 'a'를 익히는데 무려 1년이나 걸릴 정도로 열등생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땐 부모의 금고를 털어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독서에 흥미를 갖게 되어 프랑스 니스와 엑스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1969년부터 1995년까지 파리와 파리 근교 수아송의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다니엘 페낙은 <학교의 슬픔>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교육 현장의 아이러니를 살폈다.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 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학교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관계의 고통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착각하면서 시작되고, 변하는 과정에 있는 감정을 변하지 않는 결과라고 오해하면서 증폭된다. 교육의 고통도 다르지 않다. 학력의 부각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시작되고, 변하는 과정에 있는 아이들의 가능성을 오로지 학력의 기준으로 억압하면서 증폭된다.
부모로부터 비롯되었으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재하는 아이 개개인은 결과로서의 평균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는 소중한 총량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교육, 그리고 학력의 진정한 쓸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