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병을 들고있는 김진성을 촬영한 사진‘배스(Bass : 영국 맥주회사)’의 엷은 색깔의 다 마신 맥주병 10여개를 보스톤 발행의 사진판 신문인 ‘에브리 새터데이(Every Saturday)’에 싸서 한 아름 안고 있는 모습
미국 폴게티 박물관
어쩌면 150년 전 사진 속 맥주는 조선인이 마신 최초의 수입 맥주일지도 모른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다.이때부터 외국의 근대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조선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주류들도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맥주가 언제 수입되었는지 기록된 바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추측된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울과 개항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일본을 통해 세계의 맥주들이 흘러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 직후 일본과의 무역은 무관세 무역(無關稅貿易)이 강요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무관세 무역이 근대 무역의 국제적 통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 및 재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7월 25일 '조일통상장정 및 동 해관세칙'을 체결하였다.
해관세칙(세관 규칙)을 적은 한성순보 1883년 12월 20일에 '맥주(麥酒)'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해관세칙은 지금으로 따지면 수입품에 대한 세금 기준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수입되는 주류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맥주에 대해서는 술값의 10%를 세금으로 내게 했다. 참고로 당시 브랜디나 위스키의 세금은 30%로 정했다.
이후 맥주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황성신문 1901년 6월 19일자에는 점포 '구옥상전'이 낸 광고에 맥주가 수입되어 들어 왔다는 내용과 함께 판매 홍보를 하고 있다. 수입품이었던 맥주를 일반 국민이 접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광고가 계속된 것을 보면 개화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비층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1910년을 고비로 일본 맥주 회사들이 서울에 출장소를 내면서 소비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913년 전체 주류 총 소비량 23만3870 kL(킬로 리터) 중 맥주 수입량이 3349 kL로 1.4%를 차지한다. 이후 1921년에는 맥주 수입량이 3659 kL로 청주 3030 kL를 뛰어 넘었다. 탁약주 및 소주가 대부분이던 시대에서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