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전망당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화성 일대의 전망이 훤히 보인다.
운민
분명 '당나라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언급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끝내 당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밑바탕에는 화성에 위치한 당성(唐城)이 있었다.
신라가 진흥왕 시절에 처음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이후, 중국과 바로 통하는 항구로서 당성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당성을 통해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수많은 사신이 오고 다녔고, 특히 김춘추는 당성을 통해 당나라 황제를 만나 구원병을 요청했다.
통일신라 시대에 당성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신라의 고승들, 학자들이 당나라로 유학 갈 때 이 당성을 거쳐서 지나갔다고 전해지니 지금의 부산항, 인천항 같은 위상을 지녔을 거라 추측한다.
세월이 흘러 당성은 점차 잊히고, 무너진 석벽만 남은 상태였는데 1998년 발굴 조사로 당성의 진면모가 밝혀졌다. 문헌으로만 전해져 내려 오던 당성이었는데 여기서 발굴된 당(唐) 자명 기와로 인해 위치가 확증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많은 중국 도기들이 출토되었으며 화성 당성이 1차 성과 2차 성의 복합 산성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1차성은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고, 2차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계곡부까지 포함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때임을 감안하면 군사적 성격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무역, 교류를 위한 기지였기에 무역항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 주된 업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현재 당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송산면의 중심지인 사강리를 거쳐서 지나가야만 한다. 마침 장날이라서 그런지 시장을 찾기 위한 차들의 행렬이 줄지어 들어온다. 그곳을 빠져나오느라 시간을 조금 허비하긴 했지만, 예전 신라시대 당시 당성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상상하며, 시간여행을 떠나는 초입으론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릉지가 연이어 펼쳐진 지형을 지나 제법 높은 산이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당성 터널을 지나게 되면 이정표와 함께 화성 당성의 방문자센터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당성을 한 바퀴 도는 트레킹 코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송나라 시대 도자기 파편, 국제 무역기지 짐작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