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의 '아이히만'들 실미도 50주기에 부쳐 조사관이 기록한 실미도 사건
모시는사람들
<실미도의 '아이히만'들>을 펴낸 안김정애 박사는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등 3개 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하며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사건을 조사한 바 있다.
2005년 첫 번째로 맡은 사건은 1972년 세상에 알려진 실미도 사건 피해자들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70여 년 분단 조국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뒤틀리는지, 국가라는 이름과 안보를 팔아 국민의 인권이 어떻게 유린되었는지 기록했다고 밝혔다.
첫째, 나 자신이 스스로가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둘째, 여성의 시각으로 한반도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셋째, 최소한 비양심적인 당대인으로 남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
- <실미도의 '아이히만'들> 16~19쪽
전반부에서는 한국판 '아이히만'들의 육성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2부에서는 사형수 4인의 육성 기록과 형집행 관련 문서, 형장의 유언 등을 기록했다. 서문에 기록된 장면 회상은 충격적이다. 이 시대 '아이히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972년 3월 10일 사형에 처해진 실미도 공작원 4명의 시신 매장을 현장 지휘했던 공군 2325(정보부대) 시설 대대 상사 오아무개에게 암매장지 확인 동행을 요청했을 때 "손녀딸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각이다"라며 조사관 일행에게 기다리라고 하더니 취한 행동이란다.
잠시 후 집으로 들어서는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손녀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자상한 목소리로 "할아버지 다녀오마. 집에서 잘 놀고 있어라"는 말을 건네고 우리와 동행했다.
그는 유가족과 직접 대면한 최근까지도 보안각서를 이유로 정확한 암매장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위 책 11쪽
진상조사관들에게는 가해자 처벌 권한이 없었다. 이 같은 한계로 가해자들이 비공개 재판 후 처형해 암매장한 실미도 공작원들의 유해는 아직도 발굴하지 못 했다.
무의도에서 물길이 열리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실미도에서 1968년 4월부터 1971년 8월까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책의 1부는 창설, 모집, 유린, 봉기, 덮기, 재판, 횡령, 발굴의 순서로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진 배경, 모집 과정, 3년 4개월 인권유린과 가혹행위 방치와 학대·굶주림, 봉기 과정, 은폐와 축소, 생존자 비공개 군사 재판과 사형, 부대 운영비와 월급 횡령, 발굴 과정을 다뤘다. 모두 조사 자료에 의거 기술하고 있다. 2부 사형수 4인의 육성 기록 파트에서는 피의자 신문조서, 사형집행 관련 문서, 4인의 형장의 유언을 기술했다.
실미도 공작원 31명을 모집하는 과정은 쉽지 않아서,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소녀 납치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6개월만 훈련 받고 북에 한번 다녀오면 장교로 임관시켜 주고 원한다면 원하는 곳에 취직을 시켜줄 수 있다며 일자리가 필요하거나 군 입대를 앞둔 청년들을 거짓말로 꾀었다. 그들의 신분은 깡패나 범죄자로 조작했다. 전쟁 고아 등 무연고자를 겨냥했다.
생존자 4명의 재판은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한 군사 재판이었으며 '잘 협조해 베트남에 가자'는 등 거짓말로 일관한 뒤 결과적으로 4명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고 한다. 이들을 모두 처형한 후, 암매장 했다. 암매장을 현장 지휘한 가해자는 보안각서를 핑계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때문에 아직 유해 발굴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다. 실미도의 '아이히만'들은 왜 침묵, 방관, 변명으로 일관하며 사죄조차 하지 않는가. 피해자인 우리 모두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 '오늘의 범죄를 처벌하지 못하면 내일 더 큰 범죄에 용기를 줄 뿐'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뼈아픈 이유다.
실미도로 떠난 7인의 옥천 청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