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자료사진
선생은 1966년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향년 8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1964년 6월 <동아일보>에 '가난에 허덕이는 독립투사'라는 제목으로 실린 선생의 기사 중 일부다.
"옥고 30년, 팔순의 김시현옹이 전셋돈을 마련하지 못해 쫓겨나게 생겼다. 그는 무상배급 밀가루로 연명하고 있다.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에 전세 들어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 기거가 부자유해 누워서 지낸다는 김옹은 '아직 정부의 별다른 혜택을 받은 건 없으나 오는 8월쯤 원호대상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원호대상에 들 것이라 기대했던 선생은 2021년 현재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인물이건만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의 관련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서훈 심사에서 탈락하고 있다. 상훈법 제8조에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경우에는 서훈이 취소된다"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의 후손이 수차례 보훈처에 서훈을 요청했지만, 선생에 대한 심사는 단 한 번도 통과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자 책 <김시현>을 쓴 안동대 김희곤 명예교수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현재의 상훈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선생에 대한 서훈은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나도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했지만 혹여 보훈처 심사를 통과한다 해도 행안부 신원조회에서 걸려 바로 취소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유공자가 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해 봐야 한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2017년 선생의 묘를 찾아 '묘비가 없다'는 사실을 온라인 상에 알린 홍순두 충북교육청 장학관도 <오마이뉴스>에 선생의 묘소에 비석과 알림판 등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니 정부나 단체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후손들이 비석과 표지판 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더 많은 분들이 선생에 대해 알고 찾아와야 현실을 바꿀 수 있지 않겠냐"라고 설명했다.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해당 군청은 선생이 서훈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선생이 떠난 지 7년 뒤인 1973년 부인 권애라 지사는 사망했다. 권 지사는 1919년 3월 1일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권 지사는 이화학당 후배 유관순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김시현 선생을 만나 불꽃같은 연애를 한 뒤 결혼한다. 선생은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권애라 지사는 1990년에야 서훈됐고 1995년 10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64번 무덤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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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도 없는 '밀정' 주인공 김시현 묘... 그는 왜 서훈 못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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