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안경으로 새를 보고 있는 어스링스팀
사이
해가 지기 시작하자 새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잘 곳을 찾는 거라고 했다. 전깃줄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길 너머의 높은 나무들 사이로 길게 날아갔다. 새들은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 새들이 정말 자유로운지는 알 수 없다.
"새들이 날아다니니까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여기는 그나마 낫지만 계속 개발되고 있는 곳은 새들에게 전쟁 같은 환경인 거죠. 건강했던 새도 좋지 않은 환경이니까 병들 수 있고. 또 열 명이 태어나면 열 명이 죽는 거예요. 그나마 원래 터를 잡고 있던 건강한 어른 새만 간신히 살아남는 거고. 그렇게 수가 줄어가는 거예요. 사대강만 큰 문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사대강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지역에 난개발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사이)
개발로 인한 야생동물의 서식지 파괴는 인간 사회의 문제와도 닮았다. 강제로 쫓겨나고 조용히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야생동물들. 어쩌면 우리는 함께 연대할 수 있다. 가엾고 불쌍해하는 마음과 인간이 도와준다는 시혜의 차원을 넘어선, 평등한 관계의 연대를 말이다.
"그래서 불쌍하게 보는 게 아니라 이곳의 주체가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하고 사는 존재인 거죠. 본인들의 생명으로 견뎌내는 거잖아요. 이들은 이들의 목숨으로 투쟁과 저항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이)
그리고 우연히 만난 사슴들
이제 우리는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마을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드문드문 들리는 새소리를 분간해보며 걷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슴 농장이 있었다. 정확히는 녹용과 녹혈을 생산하기 위해 사슴을 기르는 곳. 우리는 길을 바꿔 그리로 향했다.
사슴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마치 내가 아프리카의 평원에 있다는 착각을 했다. 그만큼 커다란 사슴의 외형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사슴의 머리에 뿔이 잘린 흔적을 발견했다. 어떤 사슴은 좁은 울타리 안에서 계속해서 철문에 머리를 박았고 어떤 사슴은 반복해서 울타리 안을 도는 정형행동을 하고 있었다. 잠시만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 사슴의 녹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사슴의 뿔이 어떻게 잘리는가를. 야생에 사는 동물이 좁은 울타리에 갇혀 정형행동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이 순간은, 이 사실이야말로 분명 현실인데 비현실적이다. 축사 앞에는 '녹용과 녹혈의 효능'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뻔히 존재하고 있는 사슴 앞에 그런 글귀를 달아두는 인간이 몹시 무례하게 느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슴은 어떨 때 효능감을 느낄까? 인간의 보신을 위해 녹용이라 이름 붙이고 사슴의 쓸모를 정하는 것 말고, 인간의 잣대에 따라 '야생'이 되었다가 '축산'이 되었다가도 하지 않고, 사슴이 사슴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느끼는 효능감은 무엇일까? 아니, 이 효능감마저 인간만의 감정일까. 사슴은 계속해서 우리 안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우리는 힘들게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