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국회의사당.
권우성
백색독재와 카키색 군사독재시대에 정당은 스칼라피노 교수가 지적한 대로 '일점반정당체제(一點半政黨体制)'였다. 야당은 권력의 탄압, 부정선거, 정치자금 차단 등으로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 이런 결과 긴 세월 동안 민주주의는 파행되고 정당의 가치와 인식은 추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인에게 정치ㆍ정당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왕조시대의 이른바 '사색당쟁'의 폐해 때문이다. 일본 관학자들은 "조선인에게는 체내에 검푸른 혈맥이 흐르고 있어서 당쟁이 극심하다"고 생뚱한 논리를 펴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 역사와 민족성을 비틀어 반도적성격론, 정체성이론, 당파성을 들어 이른바 식민사관의 골격으로 삼고 폄훼하였다.
우리만 유달리 당파싸움이 심했던 것이 아니다. 중국 송나라의 탁당(濁黨)ㆍ낙당(洛黨).ㆍ일본 남북조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 영국 토리당과 휘그당, 프랑스 지롱드당과 자코뱅당의 살육과 대결의 파쟁은 가히 세계사적이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직전까지 사무라이들끼리 칼을 들고 권력싸움을 일삼았다. 조선 왕조는 몇 차례 사화가 있었으나, 대부분 말과 글로 하는 논쟁이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극심한 붕당싸움이 있었지만, 정작 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순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된 풍양조씨→안동김씨→여흥민씨로 이어지는 이른바 세도정치 때문이었다. 정파싸움은 상호견제와 비판으로 어느 정도 균형이 이루어졌으나 세도정치는 소수 일가문의 전횡으로 결국 나라의 파멸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래도 정쟁ㆍ당쟁ㆍ당파(싸움)는 한국인의 뇌리에 부정적인 피해의식으로 남았다. 해서 '관계하지 않는' 것이 '괜찮은' 것으로 전이될 정도로 참여(정치)를 기피하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말라"는 시조가 나오고, 이것을 처세훈으로 여겼을까. 정치인은 '까마귀'가 되고 정계는 '까마귀들의 싸움터'이니 '선비'는 허허벌판에서 고고하게 백조처럼 사는 것이 이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정치는 불을 대하듯이 할 일이다.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선 안 되고, 동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멀리가선 안 된다."는 말이 전한다. 한자의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뜻이다.
현대정치에서 정당의 순기능이 적지 않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 또는 조직과, 각급 선거에 후보 공천과 선거운동, 정강ㆍ정책의 결정 및 지도자의 선택 등이 꼽힌다. 정당법 제2조의 "정당이라 함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을 말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국민의 세금이 정당보조금으로 지원된다.
싫든 좋든 현대정치는 정당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6월항쟁 이후 거대 양당에 의해 국회가 독과점되고, 최근 20여 년 동안 양당(당명은 바뀌어도)을 중심으로 정권이 교체되어서 어느 정도 양당제가 정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흡한 편이다. 자유당ㆍ공화당ㆍ민정당ㆍ민주당ㆍ신민당ㆍ민한당ㆍ통일민주당ㆍ한나라당 등 주요 정당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국민주당ㆍ진보당ㆍ인민당 등의 연구에 비하면 의아할 정도이다. 정당(정치)이 국민으로부터 불신되면서도 여전히 국가ㆍ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현실정치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난 20여 년 '인물평전' 40여 명을 조명해온 데 이어 이번에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활동했던 정통야당 '평화민주당'(약칭 평민당)'에 대해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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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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