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 커다란 화물차이곳에는 큰 소리를 내고 덜컹거리는 화물차가 연이어 달린다.
김여진
탐조를 마치며 마지막 코스인 아시안 마트로 향했다. 왜 아시안 마트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막연히 그 뒤를 쫓았다. 마트로 향하는 길 위에는 낚시 금지라는 현수막을 등진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고, 지나갈 때마다 내가 밟는 땅이 덜컹거릴 만큼 커다란 화물차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낚시하는 이들 아래에는 새똥과 미끼로 사용한 곤충들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화물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 차 위에 앉아 운전을 하는 이들은 매일 매일 그런 소리를 듣는걸까 생각했다. 도로를 쌩쌩 가르고 크게 덜컹이고 내가 동네에서 보던 차들보다 두배는 시선이 높았던 그 차 위에 누군가는 무언가를 실고 이동하고 있었다.
커다란 차에 실어야하는 커다란 그 무언가는 또 누가 나르고 또 누가 재단하고 또 누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만들어낼까 싶어 나는 자꾸만 울고 싶었다.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가고 싶지 않은데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내가 먹는 모든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착취를 통해 나에게 왔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착취당하는 그 곳으로 내몰리게 했다.
내몰린 자들은 왜 내몰린 것일까 왜 내몰려야만 했을까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주하고 싶어 거주하는 것일까 투쟁하고자 해서 투쟁하는 것일까 자꾸만 덜컹이는 내 몸과 엉망이되는 머릿속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 걸음은 내 머릿속에서는 눈물이 쏟아져도 내 마음이 괴롭다는 이유로 내가 걸음을 멈추면 목소리를 낼 사람이, 기록을 통해 기보할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착취한다는 사실, 누군가를 내몰리게 한다는 사실,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내 입에 무언가가 들어간다는 현실을 마주하며 인간인게 괴롭다고, 슬프다고 포기하면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인들이 그 사실에 무뎌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비가시화시켰다.
내가 비건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는 페스코가 됐다. 육식에 대해 의문을 갖는 친구가 생겼다. 내가 변하니 내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의문이 생기고 변화가 생겼다. 내가 슬펐던 만큼 내 친구들 마음도 슬펐고 내가 분노했던 만큼 내 친구도 분노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배를 채우고, 불필요한 착취를 소비하지 않고, 누군가의 내몰림을 알림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가 됨으로써 그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 누군가가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이지 않게 해야 했고, 불필요한 착취를 소비하지 않게 해야 했고, 더 이상의 내몰림을 묵인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래서 울지 않고 걸었다. 아시안 마트로.
커다랗고 느린 신호의 횡단보도 앞 아시안 마트의 존재 이유 역시 그랬다. 이 곳은 공단이 늘어져 있었고, 누군가 일을 하기 위해 이 나라를 찾아온 것이었다. 비가시화된 존재는 가시화된 존재와 다를 것 없이 계속해서 투쟁하고 있다. 가시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를 인식해야 한다.
송도는 계속해서 개발될 것이다. 내가 오늘 밟았던 갯벌도, 길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오늘 만났던 새들도 언젠가 쉼터를 옮길테고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기록은 기보의 역할을 하고, 기억할 수 있게끔한다. 탐조를 떠나 에세이를 기고함으로써 나는 송도 유수지의 상황을 알리고 철장 없이 자연의 새와 생물을 볼 수 있는 이 곳의 존재를 알린다. 시멘트길인 줄 알았지만 풀꽃이 즐비한 곳. 내몰린 곳에 출발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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