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군 장례행렬 따라나선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과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이한열군 장례행렬 따라나선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과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김승현
6월항쟁 과정에서 민추협과 민주당의 역할이 컸다.
민추협은 국민대회장인 태평로의 대한성공회 대성당에 경찰의 저지에 대비, 김명윤 부의장과 김병오 상임운영위원, 이규택 국장 등을 사전에 투입시키는 등 면밀한 전략을 짰다. 민추협 사무실도 경찰의 원천 봉쇄와 폐쇄에 대비하여 철야 대기조를 편성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6월 10일 오전에는 6ㆍ10 국민대회에 앞서 사무실에서 '영구집권음모규탄대회'를 열었다. 김영삼 대표 등 70여 명이 참석하여 행사를 거행했다. 오후 6시로 예정된 대한성공회에서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대회는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되고, 사전에 투입된 민추협과 국민운동본부 20여 명, 성공회의 사제ㆍ신부 등 70여 명이 오후 6시에 예정된 식순에 따라 대회가 거행되었다.
이날 정부는 갑호 비상령을 발동하고 6개 중대 1천여 명의 정사복 경찰이 겹겹으로 애워싸 보도진의 출입도 막았다. 경찰은 4대문안 시위예상 지역에 90개 중대 1만 2천여 병력을 배치한데 이어 대학가 등 외각에 배치한 1만 여 병력도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김영삼 의장과 회직자들은 경찰의 봉쇄를 뚫고 오후 5시 20분경 차량 3대를 앞세우고 시민 500여 명과 함께 롯데백화점 앞으로 집결을 시도했으나 최루탄 난사로 좌절되기를 거듭하면서 6시 5분경 성공회대성당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발사로 진입하지 못하고 민추협 사무실로 돌아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같은 시각 김대중 의장도 동교동 자택에서 민추협농성에 동참,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시민들의 산발적인 시위에도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발사하여 해산시키는 등 과잉진압을 서슴지 않았다. 성공회대성당에서 대회를 강행한 민추협 인사들은 박종철군의 영정과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성당구내를 돌았다. 때로는 성당밖으로 나오려다 전경들과 심한 몸싸움을 벌여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경찰은 김명윤ㆍ양순직ㆍ계훈제ㆍ박형규ㆍ지선ㆍ제정구ㆍ오충일ㆍ김병오ㆍ진관ㆍ이규택ㆍ유시춘ㆍ금명균ㆍ송석찬 등 성공회대성당에서 대회를 강행한 인사들을 이날 저녁 연행했다가 13일 새벽 전격 구속했다.
정부는 6ㆍ10대회를 수많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봉쇄했지만, 노도와 같은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6월 10일의 행사가 비록 일시적으로 봉쇄되었지만, 이것은 종언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