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 광장에 자리잡은 세종대왕상세종대왕은 한반도 5000년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힌다. 한글을 창제 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경제, 과학에 이르기 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운민
여주를 대표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시대에 따라 원하는 인물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그 평가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감히 두 인물은 그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서 이 두 인물의 동상이 변함없이 내려다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나는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이고, 다른 분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다.
한반도 5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 일컬어지는 세종대왕의 릉이 바로 이곳 여주에 있다. 조선왕릉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능역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으나 여주는 이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왜 세종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효종의 왕릉이 여주에 오게 된 것일까?
먼저 세종을 살펴보면 그가 살아생전에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태종의 왕릉인 헌릉 옆에 묏자리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세종 제위기간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살벌한 주장을 펼쳤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의 장남인 문종이 제위기간 2년을 넘기지 못했고, 손자 단종 조차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쫒겨나야만 했던 것이다. 무덤터가 불길하다고 생각한 그의 후손들은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야만 했었다. 효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효종의 왕릉은 동구릉 경내에 있었으나 석물이 파손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야만 했었다.
세종대왕의 능, 즉 영릉은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여겨진다. 지금의 자리로 이장된 후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연장되었다면서 '영릉가백년'이란 말이 생겨났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 칭할 정도니 과연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세종 영릉과 효종 영릉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종의 릉을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사실 세종 영릉은 근래에 두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1970년 성역화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동상과 기념관이 들어섰고, 재실 앞까지 주차장이 들어서서 조선왕릉 중 원형훼손이 가장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