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 일제 동굴진지송악산 외부 능선 해안에 있는 일본군의 군사시설로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송악산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진지동굴이 60여개소나 되며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다.
김순애
나에게는 오빠 둘과 언니,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이 동생이 있었다. 언니랑 놀고 싶어 쫄래쫄래 꽁무니를 쫓아가면 언니는 뒤쫓아 오는 어린 동생이 귀찮은지 저만치 앞서 뛰어가다 나무 뒤에 숨어버리곤 했다.
때론 중간에 언니를 잃어버린 나는 엉엉 울며 동네를 헤맸다. 아버지는 굉장히 엄한 편이어서 어둠이 내리면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금했다. 우리 집은 동네와 떨어져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마을 공회당에 천막학교가 세워졌다. 드디어 나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엔 많은 아이들이 있는 가운데서 말 한마디 꺼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수업 중간에 오줌이 마려워도 그 말을 선생님에게 하지 못해서 옷에 오줌을 지렸던 기억도 선명하다.
찬성과 반대가 뒤얽힌 어수선한 시대
광복이 되었지만 동네는 이상한 분위기에 술렁거렸다. 젊은이들은 저녁마다 모여서 무언가를 의논했고 그들의 눈빛은 결연했다. 그 중에 가장 중심이 된 이는 고칠종이라고 마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였다.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명문인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고등학교 교사를 학고 있었다. 청년들은 고칠종 주변에 모여 들어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등 결의에 차 있었고 아버지를 찾아와서 무언가를 계속 설득했다.
그 때가 내가 아홉 살 즈음 되던 해였으니 1948년이다.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는 어수선했고 그 해 남한에서만 단독 선거를 치러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뒤얽혀 어수선한 시대였지만 제주도는 반대하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당시 아버지를 찾아왔던 동네 청년들도 남한만 치르는 5.10 단독선거에 참여하지 말고 잠시 피신을 가자고 설득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4.3이 시작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이들이 선거를 막기 위해 4월 3일 무장대를 조직하고 오름마다 봉화를 태운 후 일제히 경찰지서를 습격했다고 했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당시 무장대들이 도민들에게 뿌린 호소문)
유일하게 선거를 막아낸 지역 제주, 그러나
아버지는 어린 애들을 데리고 어디로 피신 가냐고 가지 않겠다고 처음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막상 선거날이 다가오자 마음을 바꾸셨는지 짐을 꾸렸다. 간단한 식량과 이불꾸러미를 챙기고 고령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하는 동네 노인들에게 남겨진 가축들의 먹이를 부탁했다. 그리고 갓난아이부터 10대인 큰 아들, 딸, 아직은 철이 들지 않은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떠났다. 왜 집을 떠나야 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절대 아버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는 내내 아버지의 허리춤을 꼭 잡았다.
다행히 피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많은 도민들이 산으로 올라갔고, 그 결과 제주에서 남한 5.10 국회의원 단독선거는 총 세 곳 중 한 곳만 성사될 수 있었다. 두 곳이나 투표가 무산된 것이다.
제주는 유일하게 선거를 막아낸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은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피난을 떠났던 아버지, 어머니, 동네 청년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괴력을 가지고 이후 우리의 삶을 유린했다.
당시의 제헌국회 의원 정수는 200명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선거구 두 곳에서 선거를 하지 못하면서 제헌국회는 의원 198명만으로 개원했다.
제주에서 두 곳이나 선거에 실패하자 정부는 많은 군인들과 경찰 등을 앞세워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에게 제주도는 이미 '빨갱이의 섬'이었다. 선거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과거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칠종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 단독 선거에 대대적으로 반대했기에 오도롱은 그들에게 빨갱이 마을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토벌대의 광분어린 습격을 피하기 위해 다시 짐을 싸야만 했다.
어둡고 춥고 불편하고 무서웠던 동굴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