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를 베어서 말려 놓은 모습이렇게 말린 들깻대를 작대기로 두드려 들깨알을 털어내는 것을 충청도에서는 '바심한다'라고 한다.
오창경
재작년부터 농지법이 개정되면서 직불금의 덫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밭에 뭔가를 심어야 했다. 몇 년 동안 묵혔던 밭둑에 서서 뭘 심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들깨 농사가 농사 중에 젤루(제일) 쉬운 중(줄)만 알어."
이웃의 한 마디에 그 해의 농작물은 들깨가 되었다. 아시다시피 작년은 근래에 없던 최악의 기후였다. 50여 일간 이어진 장맛비는 얼치기 농사꾼의 들깨 밭을 제물로 삼켜버렸다. 이 정도면 농사와의 인연은 역시 악연이었다. 농사만 지었다 하면 자연 재해가 닥치는 징크스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들깨 한 톨 건지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난 밭에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깨 농사가 잘 돼서 들깨를 수확하는 지난한 과정도 자신 없었다. 시골 일에 보람을 느끼기 전에 참담한 실패부터 맛본 나한테는 수확의 모든 과정에서부터 자신감을 잃었다.
잘 익은 들깻대를 베어서 말리고 바심(작대기로 두드려 깨알을 터는 것을 부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을 해서 어레미(체)로 내려서 선풍기로 디리고(날리고)서야 들깨의 모양을 갖춘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들깨를 물에 여러 번 씻어서 불순물들을 제거한 다음에 말려서 기름집에 가져가야 들기름이 되는 것이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야 들기름이 되어 밥상에 오르는 것이 모든 농사이다. 어디서 본 것만 많은 얼치기 농사꾼에게 이 모든 과정은 산 너머 산이다.
다시 농사의 계절이 돌아왔다. 올해는 뭘 심어야 할지 고민 할 사이도 없이 이웃에서 들깻모종이 많이 남았다고 가져다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또 들깨를 심어야 했다. 4백여 평의 밭에 들깨를 심는 일도 얼치기 농사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들깨 모종을 심은 다음날 허리와 어깨가 끓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년부터는 농민임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올해는 날씨는 좋아서 들깨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초 작업과 비료를 주는 일이 과제로 다가왔다. 들깨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잡초의 역습에 대비해야 한다. 제초를 해주지 않으면 들깨인지 풀인지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 밭 옆으로 지나다니는 동네 사람들의 훈수에 힘입어 제초를 하고 비료를 주며 들깨 밭을 들락거렸다. 어쩌다 나를 보게 된 사람들은 드디어 내가 마음잡고 농부가 되어 들깨 밭에 부지런히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거의 자의로 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들깨보다 풀이 키가 더 크게 생겼다는 둥, 비료가 부족해서 들깻 잎에 힘이 없다는 둥의 전화를 받은 다음에 반사적으로 밭에 가본 것이었다. 농사에서 거듭 실패만 맛보았기 때문에 온전한 수확에는 관심이 없었다.
호박과 들깨를 수확하는 기쁨
들깨 모종이 땅에서 자리를 잡고 키가 어느 정도 자라 제초 작업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 장마도 살짝 지나가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햇볕이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들깨 수확은 기대 하지 않았다.
"늦게 심어서 다 익지도 못할텐디 애호박 몇 개 따다 먹어도 되겠남?"
"애호박이요? 열리기는 했어요?"
"가을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애호박이 더 열리는 겨."
들깨 모종을 심다가 호박씨를 몇 군데 심은 것이 대박을 치고 있었다. 봄부터 일치감치 호박을 심은 마을 사람들의 밭에는 애호박보다 늙어가는 호박이 더 많다보니 따 먹을 호박이 별로 없을 시기였다.
호박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밭에 가보니 호박넝쿨이 실하고 호박잎에서는 윤기가 났다. 애호박은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동네잔치를 너끈하게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애호박을 잘 따다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소리에 어쩐지 기분이 으쓱해졌다. 밭에 뭔가를 심은 이후로 처음으로 '보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올해는 들기름 좀 먹게 생겼는디..."
처음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추석 무렵에 항상 닥치던 태풍 소식이 올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우리 들깨는 여전히 알알이 잘 익어가고 있었다.
"들깨 벼야 혀! 작년처럼 베리지(버리지) 말고 얼릉 벼서(베어서) 눕혀놓아야 마른당께."
우리 들깨 밭은 알알이 영글어가는 들깨뿐만 아니라 누런 호박도 넝쿨째 굴러다녔다. 실패의 연속이었던 우리 농사는 이번에는 호박과 들깨까지 두 작물에서 성공의 조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