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참판댁 별당. 이 별당의 주인이었던 서희의 어머니는 시동생과 사랑에 빠져 도주했고, 뒷날 서희는 여기서 해방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2019년 10월.
장호철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1부를 쓰기 시작했을 때 마흔둘이었던 작가가 예순일곱이 된 1994년, 25년 만에 그 위대한 여정을 마치고 완간됐다. 한민족의 '원형'인 토지를 중심으로 교직(交織)한 이 위대한 서사는 한국 현대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취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선생의 <토지>를 처음 읽은 것은 고교 시절, 형이 읽고 있던 <문학사상>에 연재 중인 제1부에서였다. 그때 토막글로 읽은 <토지>의 감동이 이후 한 부씩 출판될 때마다 이 책을 사 모은 힘이 되었다.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이었고, 한국인의 삶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위대한 성취, 네 번 완독한 <토지>
나는 <토지>를 통틀어 네 번쯤 완독했고, 부별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여섯 번쯤 읽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는 '다시 읽기'의 시간은 행복했다. 내가 토지의 주요 인물들의 계보를 막히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은 그 서사에 흔연히 이입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주성 이야기에서 썼듯, 처음 평사리를 찾은 것은 1988년이다. 고교생 제자 둘을 데리고, 버스를 갈아타 가면서 평사리에 내리니 마을 앞에는 나지막한 농막 하나가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 앉아 동네 사람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토지>도 박경리도 잘 몰랐고 나는 내 흥에 겨워 마을을 찾았다는 걸 눈치채고 평사리를 떠났었다.
내가 다시 평사리를 찾은 것은 2007년 1월, 아내와 보길도를 다녀오는 길에서였다. 이미 평사리는 '최참판댁'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하나씩 복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마이뉴스>에 그 답사기를 썼다(관련 기사 :
평사리, 그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다).
그리고 이태 전 10월에 이어 이번에 다시 평사리를 찾았으니 네 번째 방문이다. 2019년에 평사리를 찾았을 땐 2016년 5월에 문을 연 박경리 문학관을 반갑게 둘러보았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넘게 찾는 관광지가 되면서 최참판댁은 <토지>와 무관한, 거기 있음직한 마을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