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한 고등학교 급식실 모습.
학교비정규직노조
새벽 5시,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밥상을 차려놓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어깨며 허리며 근육통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6시 전에 버스를 타야 했다. 검수 준비를 위해서 오전 7시에 출근을 해야 한단다. 이제 막 입사한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항변하기도, 너무 벅찬 출근길이었다.
아이들이 사물함에 여유분 우산을 둔 이유
아이들이 9살, 10살이 되면서 재취업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공고문을 보고서 장거리 학교 급식실에 원서를 냈다.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합격한 터라,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아이들 휴대전화, 집 전화를 총동원해서 깨우고 일을 들어갔다. 그러면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10살 형이 동생을 깨워서 식은밥을 먹이고, 씻기고, 전기, 가스를 확인하고서야 학교를 가야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인 나는, 정신없이 일을 했다. 늦지 않게, 식지 않은 따뜻한 점심을 학교 학생들에게 먹이기 위해 말이다. 그러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는 날도 있었다. '비 맞고 오겠네. 우산 가지고 갔나?'
아이들은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오고. 아픈 맘을 내색할 수 없던 나도, 아이들도 그렇게 단단한 돌이 되었다. 여기서 누구라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정말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이들은 사물함에 여유분 우산을 놓고,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일을 시작하면 휴대전화를 볼 수 없었기에, 급한 연락을 하기가 어려워, 하루는 큰아이가 아빠한테 연락을 한 일이 있었다. 중요한 회의에서 벨이 울려 난감한 상황에서 사장님이 받아보라 하셨단다.
"아빠, 오늘 비 와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마지못해 '응' 이라고 대답했던 남편은, 지금도 그때도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버텨냈는지 다는 알지 못한다. 중간에 아이가 열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뇌수막염 의심이 나와, 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네 식구가 며칠을 병실에서 자고 출근을 했다. 학교에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해 감원이 있다 해서 차마 말을 못했다. 장거리에 아이들이 어리니, 아무래도 그 대상이 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이 서툴렀던 나는, 민폐 끼치기 싫어서 되지도 않는 속도를 맞추다, 다리가 호스에 걸려 갈비뼈를 수도꼭지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역시 말을 못했다. 참고 퇴근한 후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하루 쉬었다. 퇴근길에 넘어졌다라고 하고 말이다. 그때는 감원의 대상이 된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컸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버티며 받아든 월급 내역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TV에서나 들어봤지, 그런 월급을 받아보니 '이거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봉이라 그런지 일에 대한 자긍심도 갖지 못했다. 어디 가서 엄마 급식실 다닌다는 말 하지 말라고, 애들이며 남편한테 신신당부하기 일쑤였고, 누가 알기라도 하면 죄지은 것도 아닌데, 부끄러웠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1년을 보내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박봉에 힘든 육체노동이라고 자긍심도 갖지 못한 직장이었는데, 막상 무기계약직이 되니 해고의 불안정 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겁많은 사람이라 이 눈치 저 눈치 보다, 미뤄뒀던 숙제 같은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급여의 변화도 생겼다. 근속 수당이 생기면서 경력자의 처우가 나아졌다. 단순한 월급의 상승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면 미래에 나도 저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선배님들은 그랬다. 무리한 작업요구를 요청해도 해야 된단다. '왜?'라는 의문에 '남의 돈 벌기가 쉽니?'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억울하면 출세해야지'라는 패배주의를 무심코 받아들였다. 이렇게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많이 배우지 못한 패배자들일까?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이니, 마음대로 부리고, 쉽게 해고해도 되는 노동자일까?
잊을 수 없는 어떤 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