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이 해 4월 20일 김총재는 산업계에서 노동자들의 강경투쟁이 제기되는 등 사회혼란의 분위기가 나타나자 노동자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등 경색정국에서 온건처방책을 제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었다. 김총재는 회견에서 △5월 초 파업 자제 △정부의 반공과 체제수호 명분아래 탄압국면 조성 배제 △5공 청산 △문목사 석방 등을 요구, 비교적 온건한 시국 대처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검찰과 안기부를 통해 소환장을 발부하고 김총재가 이를 거부하자 8월 27일 검찰은 여의도 평민당사에서 김총재를 강제구인, 3일 새벽까지 15시간 동안 조사했다. 헌정사상 제1야당 총재가 강제 구인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평민당은 이에 대해 서동권 안기부장 등을 고발하고, 8월 8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시국강연회 형식의 대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탄압과 공안정국을 강력히 성토했다. 이날 평민당 연사들은 "노정권은 5공청산과 민주화를 할 것인가. 아니면 중간평가를 받을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하라"고 강조하면서 "지금 시국이 정치없이 5공시대로 역진하고 있다."고 정부의 공안통치를 비난했다.
나는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실을 김원기 총무(원내총무 - 필자)로부터 전해듣고 즉각 김총무에게 지시하여, 서의원을 국가안전기획부에 자수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안기부와 검찰은 서의원이 나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내가 경비를 댔고, 서의원이 북에서 받아온 약 1만달러의 돈을 나에게 주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날조하여 나의 정치생명을 끊으려 했다.
이 당시 나는 정말 위험한 상황에 봉착했던 것이다. 나와 평민당은 결연히 싸웠다. 그러나 이 싸움의 방법이 문제였다. 나는 당원과 시민들의 흥분을 달래면서 검찰에 의해 강제연행 당했다. 그리고 철야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서의원을 사흘이나 재우지 않고 고문을 해서 허위증언을 받아냈다. 서의원은 사흘째엔 바닥에 쓰러지며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맘대로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안당국의 행위는 마치 일제시대의 순사들이 하는 짓 같았다. (주석 6)
서울지검 공안1부는 8월 26일 김총재를 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혐의,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김총재와 평민당은 이에 맞서 노정권의 공안통치에 따른 원내외 및 법정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5공청산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1990년 2월 민정당ㆍ민주당ㆍ공화당의 3당 합당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고, 3당 총재는 김대중의 기소중지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기소중지가 시혜가 될수 없고 오히려 불법무도한 탄압에 사과해야 한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이로 미루어 김 총재에 대한 강제구인과 기소 등은 3당합당을 위한 '장애물 제거' 차원의 정치공작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