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포화 속에서 차일혁의 노력으로 살아남은 화엄사 국보 제67호 각황전 모습
우희철
화엄사를 지키기 위해 작전 명령을 불이행했던 차일혁은 감봉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각황전을 비롯해 화엄사 전각들은 소각을 피할 수 있었다. 전라도는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였고 산악에 자리 잡은 많은 사찰과 그 속의 문화재가 빨치산과의 전투 중에 소실될 가능성이 높았다.
화엄사 외에도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사찰은 토벌 작전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지만, 차일혁은 부하와 동료들을 설득해 가며 사찰들을 지켜냈다. 화엄사뿐 아니라 지리산의 천은사, 쌍계사와 모악산의 금산사, 장성 백암산의 백양사, 고창의 선운사, 덕유산의 크고 작은 사찰 등 전라도의 많은 고찰들을 전쟁의 피해로부터 구해냈다.
빨치산 대장 이현상 시신에 정중하게 예 갖춰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차일혁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항일 유격전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하해 오자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돼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그는 지리산에서 6년 동안 벌어진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1년 1월 빨치산 2500여 명은 칠보발전소를 포위하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칠보발전소는 당시 남한 유일의 전기를 공급하는 수력발전소였다. 차일혁은 75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50여 일간 생사를 초월한 전투로 빨치산을 격퇴하고 발전소를 사수했다.
1953년 9월 치열한 교전을 끝에 빨치산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그 휘하 부대 모두 섬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빨치산들의 기세는 크게 꺾이게 됐으며 토벌 작전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
남부군 사령관이자 '공화국의 영웅' 이현상의 시신은 1953년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 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게 한 뒤 그 재를 정중하게 섬진강에 뿌리고 하늘을 향해 세 발의 권총을 쏘는 예의를 갖췄다. 적장이지만 시신에 대한 예를 갖췄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지휘관들이 뭐라고 하자 그는 "죽은 뒤에도 빨치산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공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주자"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