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협이 이제 새로운 공제를 시작할 때다

해외 사례를 통해 보는 한국 사회적경제 공제 발전방안

등록 2022.01.03 14:05수정 2022.01.0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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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제조직의 역사는 산업자본주의 발달만큼 오래됐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공업화·도시화에 따라 보험제도가 성장했지만, 임금노동자나 소농민의 가입률은 낮고 계약액도 적었다. 이내 사회 계층 간 보험 보급의 격차가 나타났다. 이에 대응해 사회적·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생겨난 게 공제조직이다.

이처럼 공제조직은 부족한 의료 보장을 채우거나 사회보장 제도에서 소외된 자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발전해왔다. 공제조직은 본질적으로 그 구성원을 위한 비영리조직으로서, 건강과 삶의 다른 위험들을 상호부조로 대비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공제조합, 상호보험사 등 다양한 형태로 사회보장 서비스 제공

프랑스에서는 공제조직을 크게 공제조합법의 적용을 받는 건강공제조합과 보험법의 적용을 받는 보험공제조합(상호보험사),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프랑스 공제조합법(Code de la mutualité)에 따르면 공제조합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상해의 위험 보장, △생애주기에 따른 결혼, 출산 등을 위한 자금 저축, △실업으로 인한 소득 손실 위험 보장, △주택 취득·건설·임대 또는 개선 등을 위한 계약에 필요한 보증, △아동·가족·고령자·장애인 보호, △위생·의료·스포츠·문화 또는 장례 등 사회서비스 기관 설립 및 운영, △정부 또는 지자체, 공공기관의 사회서비스사업 위탁 운영 등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상호보험사는 일반적으로 △보충의료보험, △사망 보험금과 연금, 질병과 사고에 따른 휴업 혹은 휴직 수당, △장애 보험금과 연금, 채무 보증 등 상호부조 성격의 보험상품, △퇴직연금 보충, △노인, 장애인 같은 조합원에 대한 보건 혹은 돌봄서비스 상품 등을 취급한다.

소득, 건강상태, 성별 등으로 위험을 선별하지 않는 공제


공제조합과 상호보험사 둘 다 공통으로 연대의 원리를 적용한다. 바로 분담금이 소득에 비례하지 않거나 건강 상태, 성별 또는 기타 차별적 요소들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험을 선별하는 대부분의 민간보험회사와 공제조직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

또한 상품으로도 보험과 공제는 구별이 가능하다. 공제는 공통의 제한된 지역이나 직업 등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합원은 개별 리스크와는 독립적으로 모두 동일한 공제료를 납부한다. 반면, 보험상품은 지역적 혹은 사회적으로 제한되지 않고 위험발생의 개연율 산출방법, 가입자의 규모, 급부·반대급부 균등의 원리 등 보험수리적 원리를 적용해 개별리스크에 따라 보험료가 책정된다.


공제 관련법과 제규정이 정립돼 다양한 공제사업 활성화

이러한 점 때문에 공제조합, 상호보험사, 장래대비조합(Institution de Prevoyance)은 사회연대경제조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현재 3800만 명이 가입돼 있는 건강공제조합의 전국연합회(Mutualite francaise), 84개 상호보험사의 협회(Association des assureurs Mutualistes)로 조직돼 있다. 각각 보험법, 공제조합법, 사회보장법 등의 적용을 받지만 공제의 성격과 특성 상 보험 공제감독위의 감독 아래 재무요건 감사 및 감독, 적기시정조치, 자산운용 등은 보험사와 동일한 규제를 받고 있다. 이렇게 해외 사례를 보면 오래전부터 공제 관련법과 제규정이 정립돼 다양한 공제사업이 활성화되어 있고 공제는 국민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생협 공제는 12년째 표류 중

행정공제회, 한국교직원공제회, 과학기술인공제회, 경찰공제회, 대한소방공제회, 군인공제회, 한국관광협회중앙회 관광공제회, 한국지방재정공제회 등이 특별법 등 법적 근거에 의해 제각기 설립되고 운영 중이다. 그런데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생협 공제는 12년째 표류 중이다.

생협은 지난 12년간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와 함께 조합원 가입이 급증하고, 생협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전됐다. 친환경 제품의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에 기여하면서 현재 전체 가구의 6%인 140만 가구가 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했으며, 사업규모 역시 연 1조4000억 원에 달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매장, 물류센터, 가공 등으로 1만2000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조직의 제품 입점을 통해 판로를 지원하는 등 지역사회 활성화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반면에 생협 관련법과 정책 환경은 현재 생협의 사업구조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생협의 공제사업이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공제규정'에 따르면 "연합회 또는 전국연합회가 공제사업을 하는 때에는 공제규정을 정하여 공정거래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제사업이 법적으로 허용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인가기준 설정 등 절차가 갖춰지지 않아 조합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공제사업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협 공제는 상호부조를 통해 스스로 안전망을 만드는 협동의 방식

생협 공제는 조합원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넘어서 더 어려워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나가기 위해 상호부조를 통해 스스로 안전망을 만드는 협동의 방식이다.

생협 공제는 조합원의 자발적 가입과 비용절감 노력으로 운영비용이 적게 들고, 비영리 성격이 있어 일반 보험사에 비해 보험 보장률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복잡한 보상기준과 약관으로 정보비대칭이 발생하는 보험 상품과 달리, 상대적으로 단순한 상품 설계에 기반한 보상기준과 약관으로 불완전판매 가능성이 낮고, 조합원이 소비자이자 운영 주체라서 상호부조성에 충실한 소비자 맞춤 설계가 가능한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각 연합회가 사업목적에 따라 공제사업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이쿱, 한살림, 두레생협, 행복중심생협 등 생협과 대학생협, 의료생협이 전국단위로 활동하고 있다. 생협법에서 공제사업 실시 주체를 개별 생협이 아닌 '연합회 또는 전국연합회'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각각의 생협의 성격과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연유한다. 각각의 생협연합회가 추진하려는 공제사업의 목적도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구성원 인적 공제뿐만 아니라 기업 공제사업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는 자체 공제조직인 소코덴을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의 설립 및 운영을, 상업협동조합연합회는 소코렉을 통해 매장 신설 및 확장 등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해외 공제조합 및 협동조합연합회의 공제사업 사례와 경험을 통해 볼 때 공통으로 시행할 수 있는 공제사업과 연합회별로 독자적으로 추진할 사업들을 구분하여 인가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경제조직의 공제사업에 대해 재무건전성, 리스크 관리의 취약성과 영세성, 운영 전문성에 대해 소관부처와 금융당국의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우려는 해외 사례를 보더라도 충분히 극복 가능한 문제다. 생협공제가 허용되면 조합원 위험관리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생협이 추구하는 가치와 운영 노하우를 발휘해 공익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사회변화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온 생협이 이제 새로운 공제를 시작할 때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사업기획파트장(경기도 사회적경제센터)입니다.
#공제 #사회적경제 #프랑스 공제조합 #생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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