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신사 참도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 안에 있었던 경성신사. 처음에는 남산대신궁으로 이름하다, 1916년 일제의 정신적 동화 정책에 따라 경성신사로 이름을 바꿈.
서울역사박물관
1916년 들어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바꾸고 조선인을 정신적 동화 대상으로 삼는다. 조선신궁 건립 전까지 임시변통 격 역할을 맡기며, 아마테라스 외 주신을 추가한다. 배경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주입과 종교적으로 한반도가 일제 영토임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이에 신직이 반발한다. 종교 자유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일어난 대립이자, 국가 신토 자체 모순이다. 일본인 간에도 분열이 상당해, 충성심을 공고히 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신사 갹출금은 하층민 반감을 불러일으켜 정신적 동화를 갉아 먹는 기제로 작동한다.
또한 신직은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기보다 조선인을 '비문명적 존재'로 멸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신사는 조선인을 더욱 차별하고 배제하는 편법을 부린다. 이는 조선인이 신사에서 더욱 멀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총독부는 결국 이 작은 신사 장악에 실패한 셈이다.
경성신사는 1936년에 이르러서야 국폐소사(國幣小社)로 승격한다. 1900㎡(1915) 면적이 20900㎡(1932)로 증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