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정거장(역)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에 있던 남대문정거장의 1910년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한성부를 겁박해 36.4만㎡(11만 평)를 수용(1899)하려 하자, 황실과 백성들이 들고일어난다. 지맥을 끊고 수원화성 능행 길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부지는 17.13만㎡(5만1819평)로 줄여 수용된다. 총보상비 15.3만 원마저 일제가 차관형식으로 한국 정부에 떠안긴다.
경부선 부설권을 강탈해간 일제와 그 자본가들이 설립한 경부철도(주)가 1903년 경인철도(주)와 합병하면서 남대문역을 경인·경부선의 중심역으로 삼을 의도를 드러낸다. 러일전쟁 때 체결된 '한일의정서'로 1904∼06년 남대문역 인근 광대한 토지를 헐값에 징발해간다.
서둘러 경부선이 개통(1905.01)되고, 경성역 이름을 서대문역(1905.03)으로 바꿔버린다. 용산역에 조차장을 건설(1906.11)하여 전쟁과 대륙 진출 중심 기능을 부여하고, 여객과 화물운송은 남대문역에서 분담 처리한다.
강제 병합 후 일제는 한반도 철도 운영을 남만주철도(주)에 맡긴다.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병참선 관리 차원이다. 또한 서대문역을 폐쇄(1919.03)하고 아울러 남대문역에서 연희동을 지나 경의선 수색역을 연결하는 지선을 완공(1919.06)한다. 이제 남대문역이 한반도 철도의 기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름도 경성역(1923.01)으로 바꿔 부른다.
식민 통치 축에 앉은 경성역
강제 병합 후 일제가 수립한 경성시구개수계획(1912)이 충무로 일대 일본인 거류지를 위한 것이었다면, 개정(1919)된 시구개수계획은 본격적 식민 통치 기반을 닦는 일환이었다.
식민 지배 5주년 기념으로 경복궁 전각을 헐고 벌인 '조선물산공진회'는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에 짓기 위한 사전포석이다. 아울러 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길(태평로, 1914년 전에 폭 27m)을 경성 상징 가로로 만들어 식민 통치의 권위를 드러내자는 복선이 깔려 있었다.
총독부(1916년 착공)∼경성부청(1923년 부지확보)∼철도 호텔(1914)∼조선은행(1912)∼조선신궁∼경성역을 잇는 식민 도시 경성의 통치 축이 이때 같이 구상되었다는 추측은 그래서 매우 타당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들이 1920년대 중반까지 순차적으로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