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동학혁명탑동학혁명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후퇴함. 이 탑을 일본 장교출신 대통령이 세웠다는 글(탑신 건립문)에 있는 그의 이름을 사람들이 돌로 쪼아 버렸음.
이영천
혁명전쟁에서 가까스로 법통을 보존시킨 북접은 각지로 피신 다니며 포교에 힘쓴다. 최시형은 후계자(손병희, 김연국, 손천민)를 세워 재건에 착수하는 한편, 손병희에게 북접 도통을 전수(1896.12)한다. 최시형이 처형(1898.06)당하고 후계자 간 노선 갈등이 생기자, 손병희는 세력을 넓혀 풍기에서 대도주에 추대(1900.07)되어 교권을 장악한다.
손천민이 처형(1900.08)당하고 동학은 손병희, 김연국 두 계파가 공존·대립한다. 정부는 동학을 반역 세력으로 규정하고, 손병희는 문명개화로 노선을 전환해 교단을 측근들에게 맡기고 외유를 단행(1901), 정착한 일본에서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한다.
천도교 창건과 변화
러일전쟁 때 동학은 종속적 발전주의인 '일본동맹론'에 편승한다. 일본에 전비 1만 원을 지원하고 진보회를 조직(1904.09)하여 정부를 상대로 정치투쟁을 벌여보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정부는 진보회를 동학 잔당이라 탄압하고, 일본도 동학이 반일 성향이라 의심한다.
길을 잃은 진보회가 친일 단체 일진회와 합병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 주구로 전락한 일진회는 손병희에겐 큰 부담이다. 대중의 곱지 않은 시선에 측근마저 세력권에서 벗어나려는 조짐을 보인다. 이에 손병희는 망명 개화파와 '천도교 창건(1905.12)'으로 흐름을 바꿔, 이듬해 1월 귀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