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이 묻힌 '만인의총' 앞에서 할 말을 잃다

남원성 아닌 지리적 이점을 가진 교룡산성에서 싸웠더라면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

등록 2022.01.10 17:05수정 2022.01.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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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명이 묻힌 만인의총.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명이 묻힌 만인의총. 오문수
    
지난 5일, 지인들과 함께 정유재란 당시 1만 명이 희생된 남원성 일대 유적지를 돌아봤다. 1만여 명이 합장된 만인의총 앞에서 희생된 선열들에게 묵념한 후 집에 돌아와 공부하며 당시 조선을 이끌던 지도부의 무능과 무지를 탄식했다.

전쟁에 대비해 군사와 군량을 남원성에 바쳤던 내 선조도 그곳에서 전사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당시 1만 명이 죽어 핏물이 흘러 들어간 남원성 밖 요천수가 내 고향마을 앞까지 흘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남원성에서 17km 정도 떨어진 하류에 있는 곡성이기 때문에 절절함이 더했다.
 
왜군이 남원성을 공략대상으로 삼은 이유
임진왜란 당시 호남 점령실패 때문


정유재란시 왜군이 남원을 노린 이유가 있었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에 있는 남원은 지리와 군사 행정 요충으로 신라 시대에는 5소경 중 하나였다. 섬진강과 낮은 고개를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로 연결될 수 있는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호남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전쟁 패인 중 하나로 인식했다.

1597년(정유년) 14만5000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재침한 왜군은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격파한 후 왜장 고바야가와를 중심으로 육군을 좌우로 나뉘어 전진케 했다.

경상도 우군은 서생포, 밀양, 초계를 거쳐 운봉, 장수를 거쳐 전주로 향했다. 좌군 주력은 7월 28일 부산포를 떠나 해로를 통해 사천으로 상륙했다. 안골포에 주둔하고 있던 모리 요시나리 부대와 이오 유해이 부대 등이 합류해 8월 5일 하동현으로 진출했다. 7200명의 수군도 좌군에 합류했다.

8월 7일 구례에 들어온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는 수군을 합친 주력부대와 함께 8월 13일에 남원성 가까이 까지 왔다. 조선군과 명군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경상도 함양을 경유해 남원성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남원을 지키기 위한 조선군과 명군의 대비


명나라 구원군이 남원에 오기 전에 조정에서는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을까? 남원에는 남원 중심부 평지에 자리한 남원성과 남원성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진 교룡산 중턱에 있는 교룡산성이 있었다.
  
 남원성에서 서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교룡산성 모습
남원성에서 서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교룡산성 모습오문수
 
교룡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 중턱에 있는 성으로 둘레 3km, 높이 4.5m(15척)이며 성안에는 마면 7개소, 샘 99개소, 치첩 1016개소 그 밖에 군창과 무기고가 있었고 4대문이 있었다. 곡식과 무기, 소금, 장을 보관했을 뿐만 아니라 승병도 상당수 있었다.

규모가 남원성보다 작았지만 해발 518m의 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구원군이 오기 전의 남원 방어계획은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승장 처영이 보수하여 증축한 교룡산성을 중심으로 수립됐다.


선조 30년 1월에는 운봉, 장수, 진안, 임실, 구례, 곡성 등 6개현 및 남원부의 쌀과 콩을 교룡산성으로 모아두게 한 뒤 이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모든 가족을 거느리고 산성으로 들어가게 했다. 동년 2월에는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남원판관 이덕희가 상총통 1000자루를 대구에 보냈다. 이는 남원성을 보호할 정부의 적극적인 방어계획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에서는 양원을 수장으로 한 구원병 3000명을 보내 전투가 벌어지기 두 달 전인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해 1300여 명의 관군·의병과 합류했다. 남원에 도착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한 양원은 교룡산성에 있던 군량과 군기를 남원성에 운반하고 남원성에만 전력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모습.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모습. 김용근
   
 복원된 남원성 모습
복원된 남원성 모습오문수
 
남원성 전투가 있기 전 잠깐 한양에 들른 양원에게 선조가 "오로지 본성만을 지키고 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군들이 먼저 산성을 점거해 우리들을 곤경에 빠뜨릴까 심히 두렵다"고 하자 양원이 대답했다.
 
"내가 이와 같이 남원성을 지키는데 저들 왜적이 어찌 감히 접근하겠습니까. 내가 저들이 오는 길목을 지키어 적들이 함양 운봉사이에 얼씬도 못하게 할텐데 하물며 저들이 이 산성을 점거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한다면 적은 양이요. 나는 호랑이입니다. 저들이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내겠습니까."
 
양원은 남원에 도착하자마자 남원성 성벽을 13자 높이로 개축하고 여장을 2~3장 더 쌓았다. 그리고 17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성벽 아래에 깊이 두 길 정도의 해자를 5일 만에 완성했다. 또한 양원이 남원으로 올 때 한양 군기고에서 가지고 온 대포 27문을 각 성문에다 2~3문씩 설치했다.

작전 실패와 중과부적이었던 조명연합군

전투 첫날일 8월 13일, 왜군은 공격부대를 결정하고 남원성을 포위한 뒤 공격했지만 조선관군과 명나라 구원병이 진천뢰, 승자총 등을 계속 쏘아대니 포위망을 좁힐 수 없었다.

이튿날인 14일, 왜군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호를 메우고 통로를 만들었다. 또한 민가의 판자를 모아 방책을 세웠다. 더불어 성 밖에 있는 민가의 타다 남은 담장 벽에 구멍을 뚫어 총을 쏠 수 있게 했고 삽교 부근에 높은 사다리를 세워 놓고 성안을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다. 양군간에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자 왜군은 심리전도 벌였다. 일행을 안내한 남원 향토사학자 김용근씨의 설명이다.

"남원을 지키는 사방신으로는 동쪽에 백공산(선원사), 서쪽에 만복사, 남쪽에 완월신, 북쪽에 교룡신이 있어요. 왜군은 사방신의 존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만복사에서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성 주위를 돌아다녀 성안의 조명연합군을 크게 당황하게 했을 뿐만아니라 선원사와 광한루, 만복사를 동시에 불태웠어요"

작전 실패도 있었다. 14일, 양원은 "적군이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와 아군의 사기가 떨어졌으니 적에게 약하게 보이면 불리하다"면서 "오늘은 성문을 열고 출격하여 적과 싸우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병력 1000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왜군을 공격했다. 왜군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것처럼 도망가다 되돌아서 급습하니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남원성 전투 마지막 날인 16일 오전 10시께, 성 높이까지 풀단을 쌓은 왜군이 성 위로 기어올라 성루에 불을 지르자 왜군이 대거 남문으로 들어왔다. 관군과 명나라 구원병 및 부민의 남녀노소는 북문으로 몰려 들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전쟁은 끝났다.
 
승리한 왜군... 대량살육과 함께 코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


정유재란시 남원전투에서는 대량살육과 코베기가 자행됐다. 왜군과 함께 종군했던 안양사 주지 경념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는 당시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8월 16일 남원성내의 남녀노소는 무참하게도 모조리 참살되었다. 8월 19일 날이 밝아 남원성 밖을 보니 길가에는 죽은 사람이 산더미 같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풍신수길이 시마쓰 다다도요장군에게 보낸 1597년 9월 13일에 발행한 코영수증으로 코 815개에 대한 영수증이다. 전문을 보면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13개 베어 그 코가 도착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 나가모리, 나쓰가 마가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다 겐이에게 잘 말해두겠소" 라고 적혀있다
풍신수길이 시마쓰 다다도요장군에게 보낸 1597년 9월 13일에 발행한 코영수증으로 코 815개에 대한 영수증이다. 전문을 보면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13개 베어 그 코가 도착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 나가모리, 나쓰가 마가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다 겐이에게 잘 말해두겠소" 라고 적혀있다남원문화원 발행 <정유년 남원성 싸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왜군들이 죽인 사람들의 코를 베어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왜군이 조선에서 벤 코는 대략 21만4000여 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남원에서 베어진 코는 1596개다. 왜장 시마쓰 다다도요 13개, 가도오 요시아기 55개, 도오도오 다가도라 269개, 시마쓰 요시히로, 시마쓰 이에하사 421개, 오오다 가스요시가 662개의 코를 베 풍신수길한테 보냈다.

남원성 함락 원인 세 가지

후세 사가들은 남원성 함락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교룡산성을 포기하고 남원성만 고집한 양원과 필요없는 작전을 벌여 병력손실을 가져왔다. 둘째, 중과부적이었다. 왜군은 5만6000여 명이었는데 아군은 4300여 명에 불과했다. 남원성 주민들까지 합쳐도 왜군이 10배나 많았다. 셋째, 아군의 사기는 극히 저하된 반면에 왜군의 사기는 왕성했다. 아군은 도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남원을 점령한 왜군은 남원 인근의 도공들을 납피해 일본 도자기산업을 일으켰다. 패배한 전투도 우리의 역사다.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참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남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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