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명이 묻힌 만인의총.
오문수
지난 5일, 지인들과 함께 정유재란 당시 1만 명이 희생된 남원성 일대 유적지를 돌아봤다. 1만여 명이 합장된 만인의총 앞에서 희생된 선열들에게 묵념한 후 집에 돌아와 공부하며 당시 조선을 이끌던 지도부의 무능과 무지를 탄식했다.
전쟁에 대비해 군사와 군량을 남원성에 바쳤던 내 선조도 그곳에서 전사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당시 1만 명이 죽어 핏물이 흘러 들어간 남원성 밖 요천수가 내 고향마을 앞까지 흘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남원성에서 17km 정도 떨어진 하류에 있는 곡성이기 때문에 절절함이 더했다.
왜군이 남원성을 공략대상으로 삼은 이유
임진왜란 당시 호남 점령실패 때문
정유재란시 왜군이 남원을 노린 이유가 있었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에 있는 남원은 지리와 군사 행정 요충으로 신라 시대에는 5소경 중 하나였다. 섬진강과 낮은 고개를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로 연결될 수 있는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호남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전쟁 패인 중 하나로 인식했다.
1597년(정유년) 14만5000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재침한 왜군은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격파한 후 왜장 고바야가와를 중심으로 육군을 좌우로 나뉘어 전진케 했다.
경상도 우군은 서생포, 밀양, 초계를 거쳐 운봉, 장수를 거쳐 전주로 향했다. 좌군 주력은 7월 28일 부산포를 떠나 해로를 통해 사천으로 상륙했다. 안골포에 주둔하고 있던 모리 요시나리 부대와 이오 유해이 부대 등이 합류해 8월 5일 하동현으로 진출했다. 7200명의 수군도 좌군에 합류했다.
8월 7일 구례에 들어온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는 수군을 합친 주력부대와 함께 8월 13일에 남원성 가까이 까지 왔다. 조선군과 명군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경상도 함양을 경유해 남원성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남원을 지키기 위한 조선군과 명군의 대비
명나라 구원군이 남원에 오기 전에 조정에서는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을까? 남원에는 남원 중심부 평지에 자리한 남원성과 남원성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진 교룡산 중턱에 있는 교룡산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