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이사 갈지도 모르는데, 왜 엉뚱한 데 돈을 들이고 그래? 이사 가서 하지."
고정미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집안을 꾸미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집을 '결혼하면 곧 떠날 곳', 한 마디로 '임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지금은 바뀌었다. 요리학원에 다닌다는 친구가 느닷없이 부러워졌다. 친구를 오래 지켜봐서 알지만, 그 친구나 나나 요리에는 젬병이었다. 나와 요리 실력이 막상막하이던 친구가 결혼하고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요리가 많아지더니, 가끔 불러서 자신만의 필살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데 맛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음식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정성을 담아 맛있게 집밥을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며 요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불쑥 자라난 모양이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엄마의 기력이 점점 쇠해지면서 내가 주방에 들어갈 일이 잦아진 탓이다. 덕분에 요리 레시피들이 쌓여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의 가장 실책은 '지금'을 '임시'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4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늦더라도 결혼을 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비혼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언젠가는 결혼해서 집을 떠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머물고 있던 집, 내 방은 임시로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밖에.
살림살이도 무조건 엄마 위주였고, 내 방은 물론 집안의 인테리어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난 곧 떠날 사람이니까.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간다. 당연할 줄 알았던 결혼은 나에게 이르지 않았고, 이제 혼자 사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고 보니 내가 임시로 밀어놓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과 내 방을 꾸미는 일에도 자연히 관심이 가서 인테리어 사이트인 '오늘의집'을 얼마나 많이 들락거리는지 모른다. 온갖 주방 기구와 식기들은 <젊음의 행진>에 나오는 짝꿍들이 생각날 만큼 올드하다.
몇 번이나 예쁘고 좋은 것들로 바꾸자고 했지만, 변화에 저항적인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작년 초에는 내가 입이 마르도록 설득해서 정리 전문업체를 불러서 집안을 한번 싹 정리했고, 15년 이상 쓴 낡아빠져서 고장난 싱크대를 하부장만 겨우 교체했다. 그때 엄마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곧 이사 갈지도 모르는데, 왜 엉뚱한 데 돈을 들이고 그래? 이사 가서 하지."
이사할 계획을 갖고는 있지만, 집이 언제 나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곧 이사를 간다 해도 깨끗하고 산뜻하게 집을 정돈하고 싶었던 나는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 우리가 집을 팔려고 해도 깨끗하게 해놓아야 집을 보러 온 사람도 좋지. 그리고 우리 그동안 너무 안 고치고 짐들을 이고지고 살았어. 언제 갈지 모르는 이삿날에 담보 잡혀서 지금 이렇게 너저분하게 살지 말자."
임시가 아니고 지금을 소중하게
다행히 엄마는 나의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아직 우리는 이사를 못 가고 있으니 그때 한번 정리하고 고치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는 훨씬 쾌적하고, 집 다워졌으니까.
지금을 '임시'라고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최선으로 행복하게 살 것. 그래서 좋은 것을 미루지 않는 것. 설사 그게 경제성이 떨어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는 경제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여기까지 오는데 나도 많은 '임시'에서 시행착오를 거쳤고, 엄마와 얼마나 많이 다투고, 입이 아프게 설득했는지 모른다. 가끔은 이런 과정들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정돈되고 쾌적해진 집을 썩 마음에 들어하시는 그걸로 되었다.
여전히 우리집의 모든 건 엄마 위주다.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구조가 허용되었고, 엄마가 활동하시는 동안은 그렇게 해드리고 싶다. 그래서 가장 바꾸고 싶은 주방도 크게 손을 보지 않았다. 아직은 주방의 주인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지켜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 나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주방을 갖고 싶다. 엄마를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내 몸에 익숙한 주방에서 다양한 요리를 해보고 싶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너무 하찮게, 성가시게 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방이 좋아야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겠지만, 한 번도 내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그래서 내 것인 적이 없었던 나의 주방을 언젠가는 갖고 싶다. 내 취향의 그릇들에 정성껏 만든 음식들을 담아 친한 사람들에게 대접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알고 있다. 그런 날을 꿈꾸는 동시에 '지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임시가 아닌 '지금' 있는 곳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기며 '언젠가'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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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혼으로 살 줄 몰랐다... 그래서 하게 된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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