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 항공사진1930년대로 추정되는 조선신궁 항공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이런 이유로 하여 일제의 신사 제도가 전개되기 시작하더니 3ㆍ1혁명 직후에는 조선신궁 설립이 고시되고, 1920년 이른바 지진재(地鎭齊)를 거행하고 한국의 주산(主山)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일제강점 초기 기독교인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한국기독교인의 활약상은 3ㆍ1혁명 후 체포투옥자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3, 4월 중에 피체된 사람은 1만 9,000여 명인데, 이 중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전체의 약 17%를 차지한다. 또 그해 6월 말 현재 투옥된 사람이 도합 9,456명이었는데 그 중 기독교인이 2,033명으로 21%에 해당한다. 당시 국내의 기독교인을 30만 명으로 추산할 때 인구 2,000만 명에 비하면 1.3%에 불과한 숫자이다.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기독교인이 만세운동 주동세력의 25~38%, 초기 피체자의 17%, 투옥자의 21%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3ㆍ1항쟁 전체적 역량의 20% 이상이 당시 한국 인구의 1.3%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보면, 3ㆍ1혁명과 관련, 파괴된 교회당이 47동, 일부 파괴 24동, 피해 41동이며, 1919년 6월 말 현재 투옥된 사람이 151명, 고문당해 죽은 신자가 6명이었으며, 기독교재단이 경영하는 학교 2동이 불타 없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한국기독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기독교와 민족운동의 연계를 차단시키기 위하여 온갖 음모와 공작을 서슴치 않았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기독교를 적대시 내지 위험시하였다. 한국을 지배하는데 기독교를 장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에 의해 뒷받침된 천황제에서 찾을 수 있다. 천황제가 지닌 국수주의적이고 침략주의적 성격, 그리고 현인신(現人神) 천황과 신도의식에서 엿볼 수 있는 종교적인 성격 모두가 한국 기독교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신궁을 세우고 치안유지법을 통해 민족운동을 더욱 옥죄었다. (주석 2)
주석
1>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235쪽, 사람과 사람, 1998.
2> 앞의 책,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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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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