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은 젠더에 따라 체계화된다’고 설명한다. ‘여성들에게 수치심을 부추기는 요구는 우리 문화가 여성에게 무엇을 허락하고 무엇을 허락하지 않느냐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남성에게 수치심을 부추기는 요구와 기대는 우리 문화가 원하는 남성성, 즉 남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생겨야 하는가 등을 바탕으로 한다’. 피해의 '순도'를 따지는 문화는 이러한 성 역할에 대한 압력과 한 데 얽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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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편견은 여전히 도처에서 재생산된다. 어렵게 꺼낸 피해자의 언어는 "너도 덩달아 미투냐" "원해서 한 것 아니냐"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뻔하다"는 제3자의 재단으로 왜곡된다. 더 솔직해지자. 그 의심의 본질은 옳고 그름이 아닌 호불호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의 서사 앞에 쉽게 지치고 불편함을 느끼는 심리에는, 자신도 '쓰레기'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수치심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수치심 연구자인 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이런 말들을 '속삭이는 꼬리표(whisper-labels)'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회공동체의 전형화에서 비롯된다. 그는 '헤픈 여자, 창녀, 쓰레기, 수다쟁이, 남자 잡아먹을 여자, 미친년, 호들갑쟁이, 노이로제 환자, 이기적인 얼음마녀 등등 상처를 주는 꼬리표는 셀 수 없이 많'고,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것을 자신이 위협받는 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강의실에 앉아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심지어는 아동인 경우에도 비난받고 외면받는다는 사실에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현실에서는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벽을 쌓는 게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중요한 건, 두렵다고 생각했던 불행이나 고통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도 다양한 전형화에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이다. 전형화는 사회구성원을 다양한 틀에 묶어 누구라도 걸려드는 '수치심 거미줄'을 만들고, 이렇게 양산된 수치심은 다시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해 개인을 억압한다. 사회의 꼬리표 붙이기에 자신 역시 희생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내가 불편했다
젠더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저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기 싫다'고 생각했었다. 응원했지만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미 활활 치솟는 불길 속에 내가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을 화약처럼 지고 들어가, '(꼴)페미'라는 비난과 함께 연소되자니 생각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서서히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나 역시 내가 불편했던 거다. 인생 곳곳에 이끼처럼 낀 성적 수치심과 분노, 무력감, 자책을 되살려 마주하기가 꺼려졌고, 내 목소리가 피해의식과 이기심으로 매도되면 더 깊은 상처가 남을까 두려웠다.
돌아보면 젠더폭력은 일상이라 해도 과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수영장에서,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애들에게, 집에서 친척에게, 중고등학교 때는 버스와 화장실에서 막을 새도 없이 성추행을 당했다. 등하굣길에 차로 따라오며 중요부위를 자랑하던 남자들은 하도 자주 만나 나중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유학시절 일하던 가게의 사장이 1년 내내 나와 친구들의 브래지어 끈을 더듬던 일, 대학원 때 노래방에 가면 여자 대학원생들을 옆에 끼려 하던 교수, 허리 교정치료를 받던 어느 날 느낀 평소와 다른 손길. 그러나 훨씬 큰 고통을 받은 내 주변의 여성들 앞에서 나는 그저 미안하도록 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끈덕지게 들러붙은 건 상대를 향한 분노가 아닌 자기비난이었다. 그런 일이 생긴 게 내 탓 같았다. 가게 사장의 이중성에 치를 떨면서도 "유학 끝날 때까지만 참으면 되니까"란 말로 서로 다독이던 어린 나와 친구들의 무력함, 내 의사를 무시하고 치료를 권력처럼 휘두르는 지압사에게 반발심을 사지 않으려 조심했던 어리석음.
"네가 말을 똑바로 했어야지."
"네가 어리바리하고 만만해 보여서 그런 일을 당한 거야."
내가 먼저 내게 말했고, 이런 자책은 여성의 몸이 겪는 일을 '여성의 몸가짐' 문제로만 치부하는 사회문화를 충실히 내면화한 결과였다. 그나마 타인의 비판적 시선을 빌려 나를 보지 않기로 맘먹게 된 건 그간 많은 이들이 젠더 폭력의 가시화에 나서준 덕분이다.
전형화의 굴레에 예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