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세운상가>작품의 한 장면
극단 명작옥수수밭
<메이드 인 세운상가>는 역사적 상황이 던진 딜레마에 놓여있는 소시민의 이야기이다. 북한의 수공 위협으로 공포분위기가 몰아치던 1986년은 경제적으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시대다. 풍요와 강압이 공존한 시대에 '먹고사니즘'과 '어떻게 사는지'에 관한 갈림길에 놓였다. 만약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 딜레마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메이드 인 세운상가>는 소극장에 맞지 않는 블록버스터급 스케일을 자랑한다. 실제로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최원종 대표는 "원래는 대극장 작품으로 구성했다가 소극장에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상상을 뛰어넘게 디테일한 소품과 무대구성이 돋보인다.
실제로 말미에 공개되는 잠수함이 무대를 뚫고나오자 객석의 여기저기에선 탄성이 쏟아져나왔다. 여기에 소극장인데도 무려 22명의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더욱 대단한 것은 한결같이 물오른 연기력으로 120분에서 빈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사상을 심어놓은 정부(정권)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메이드 인 세운상가>는 어두운 시대상을 당시의 정치적 암흑기로만 국한하지 않았다. 어쩌면 "역사적 딜레마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거짓이 난무하는 정치의 혼돈엔 브레이크가 없다. "자칫하면 서울올림픽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정부의 발표를 서로 다른 시각으로 대립시킨다.
반공 사상이 투철한 포르노 유통업자와 반독재 저항의 상징인 입양아 출신(조국은 버렸지만 조국을 다시 찾은)의 MIT공대생. 서로 다른 배경과 사상을 가진 두 인간의 불튀기는 갈등을 바라보면서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셈이다.
쉴틈 없는 화면 전개와 변화무쌍한 캐릭터 덕분에 관객들은 단 일 분의 지루함도 느낄 새가 없다. 다양한 콘셉트와 상황이 급변하기 때문에 조금만 정신줄을 놓는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월북을 꿈꾸는 형사, 망명을 시도하는 간첩, 반공을 잡기 위해 서로의 본캐를 숨기는 트릭이 난무하다.
적군과 아군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혼동되는 상황, 마지막으로 잠수함을 만들었던 사건이 나라를 위한 훈장이었는지 반역이었는지까지 섞여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막 전환은 아마도 이 연극이 주는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열흘간 이어지는 기간 중 다시 한 번 예약하고 싶게 만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추천 작품이다.
각 점포 사장들의 연기와 캐릭터에 경의를 표한다. 실제로 무대에 오르는 22명은 대학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들이다. 최 대표는 "각 배우들은 다른 작품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검증됐다"라며, 연일 매진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비결을 배우에게 돌렸다.
세운상가를 그대로 떼어다놓은 듯한 디테일한 무대는 초반에 분위기를 압도한다. 상상만하던 잠수함은 미디어 영상이 아니라 500톤의 사이즈를 가늠하는 스케일로 제작됐다. 삼삼오오 모여서 잠수함을 설계, 제작하는 광경도 영화에서 볼법한 미디어 영상 기법을 적용시켜 극한의 생생함을 선보였다.
"나라에서 우리한테 거짓말했다 이거냐?"
"나라가 아니라 정권에서 한 거죠!"
개인의 생각보다는 집단의 사상이 중요시됐던, 나만의 의견을 제시하면 철저하게 묵사발되던 암묵의 시대. 그들은 나라를 위해 자신은 희생해야 했던 부모 세대를 보여준다. 자기가 살던 집을 팔아 나라에 봉헌(?)하고, 주류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무의식주의자로 격하시킨다. 금강산 댐, 평화의 댐, 광주민주화운동, 무거운 소재를 위트 넘치게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