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 유희춘 간찰미암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던 길에 부인 송덕봉에게 보낸편지다. 당시 편지는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알리는 일상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미암 박물관>
정윤섭
<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거의 매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편지를 통해 수시로 당시 사림들과 교류하였으며, 집안의 대소사나 인척들과의 일들을 주고 받았다. 기대승과 이황이 편지를 통해 '사단칠정론' 사상논쟁까지 벌였을 정도로 편지는 일반적인 정보교환 수단이었다.
경방자 통해 지방 소식 전달받아
지금처럼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유희춘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편지를 통해 지방(해남)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해남은 서울에서 가장 먼 곳 중에 하나였지만 빈번하게 소식들이 오가고 있었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 해남의 일가 친척들과 지속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해남에는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없었지만 과부가 되어 살고 있는 누님과 첩 남원방씨, 그리고 무엇보다 사위인 윤관중을 비롯 사돈 집안인 해남윤씨가 재지사족(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살고 있었다. 따라서 유희춘은 이들과 수시로 편지를 전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지금의 우체부처럼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없던 16세기 무렵은 어떻게 편지를 주고 받았을까? 일반적으로는 사대부 양반들은 대부분 집안 하인들이 편지 심부름을 담당하였다. 어느 정도 글귀를 알아먹고 똑똑한 하인이 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암일기>를 보면 이 편지를 전달하는 이로 '경방자京房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방자는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문서를 전달하는 하인으로 소속 지방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경방자는 공적인 문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던 것 같다. 유희춘이 유배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된 1567년 10월 19일 해남의 경방자가 사돈관계인 해남윤씨 윤동래의 편지를 전달해 준다.
1567년 10월 19일
해남의 경방자가 윤동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내가 안동대도호부사 윤복과 해남누님과 첩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또 성주 김응인 앞으로 청어를 파는 배에다 작은 묘표석 세 개를 실어 순천의 영춘(유희춘의 사촌동생)에게 보내달라고 가지고 왔다.
경방자는 관의 공적인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처럼 관직에 있는 사대부들의 편지를 전달해 주는 역할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나자 자신의 해배 소식을 관속官屬을 빌려 담양과 해남에 편지를 보내 알리게 한다.
1567년 10월 14일
해질 무렵에 이조의 하전이 12일의 전하의 교지를 가지고 왔는데 유희춘, 노수신, 김난상을 방면해 주고 직첩도 돌려줄 것이며 경연관으로 차출한다 하고 …, 관속을 빌려 좋은 소식을 담양과 남원에 알리고 또 전라도 도사에게도 편지를 보내 해남에도 알리게 했다.
편지의 왕래는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미암일기>가 시작되는 1567년 몇 달만 보아도 유희춘은 쉴새없이 해남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결혼과 함께 처가가 있는 담양으로 거주지를 옮겨 가기는 했지만 부모님의 산소가 있고 일가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해남과 더 많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