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공사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이 지난 2020년 6월 25일 오후 서울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비정규직 보안검색 요원들의 정규직 전환 관련 입장을 발표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어떤 사람이 거둔 성공은 일련의 행운을 겹쳐서 만난 덕분인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이란 것이 실제로는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행운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프랭크(R. Frank) 교수가 쓴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Success and Luck)> 라는 책이 바로 이 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생의 성공은 행운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 말이지요.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사람의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에 거의 다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느냐는 운에 의해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크게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저 피상적 관찰을 한 결과에 의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관련 연구자들이 수행한 엄밀한 과학적 분석 결과에 기초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1960년대 미국 사회학계, 심리학계를 크게 들썩거리게 한 논쟁이 바로 'nature vs. nurture(본성 대 양육)' 이슈입니다. IQ 점수로 대표되는 어떤 사람의 인지적 능력(cognitive ability)이 타고난 유전적 요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느냐 아니면 성장기의 교육적 환경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느냐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단지 학문적 관심 때문만이 아니고 정치적 함의 때문에 더욱 가열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 입장에 선 사람은 유전적 요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분석결과를 반겼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취약계층 자제들의 교육적 환경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에 아무리 돈을 퍼부어 보았자 낭비에 그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당시의 논쟁 결과를 보면 두 요인이 대체로 반반씩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간에,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 모두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게 사실 아닙니까?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온 아기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지적 능력은 거의 전적으로 태어날 때의 운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자신의 선택이나 노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데는 오직 인지적 능력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집중력, 호기심, 진취성, 성취동기, 인내심, 사교성 같은 비인지적 특성(non-cognitive characteristics)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측면도 유전적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성장기의 배경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최근에 언급한 바 있는 하든(K. Harden) 교수의 < The Genetic Lottery: Why DNA Matters for Social Equality >라는 책은 이 사실이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입증되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IQ는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이 80% 이상을 결정한다는 연구결과가 확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은 95% 이상, 그리고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은 85% 정도라니 비인지적 특성도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학력주의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학벌이 좋은 사람을 능력이 많은 사람으로 간주해 우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졸업장을 손에 쥐면 일자리 얻기가 더 쉬워지고 더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소위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는 것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구요.
태어날 때 운이 좋아 인지적 능력과 비인지적 특성상의 우위를 갖는 사람은 교육과정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이고, 이는 사회에서의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든에 따르면 텍사스주에서 쌍둥이를 대상으로 수행한 분석 결과 수학과 영어 시험성적의 70% 이상이 이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30%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영국의 경우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1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구요.
능력주의의 함정 꿰뚫어야
하든은 이것을 출생 당시의 복권추첨(lottery)에 비유해 과연 어떤 복권을 뽑아들었는지가 한 사람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능력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우연의 결과이며 본인의 노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능력주의가 매우 정의롭고 공정한 원칙 같지만, 실제로는 우연의 결과에 기초하고 있는 공허한 원칙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가정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는 운이 경제적 성공 여부의 열쇠가 된다는 데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생존경쟁에서 갖는 엄청난 이점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압도적인 이점을 갖고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 좋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행운으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미 성공이 거의 보장된 상태로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능력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운이 좋은 사람을 우대하는 데 있지는 않을 겁니다.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을 미덕으로 보고 이것을 통해 성공을 이룬 데 대해 후한 보상을 하는 것이 능력주의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능력주의는 이와 같은 이상과 크게 동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운이 좋은 사람을 우대해 주고 있는 것이니까요.
샌델이 비판하고 있는 능력주의의 결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사람이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오만에 빠지게 만드는 동시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못나서 그런 것이라는 굴욕감을 안겨 준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못나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게 아니라 단지 운이 나빠서 그런 것인데도 말입니다.
샌델은 우리가 능력주의적 오만에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잘나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는 사람이 감사와 겸손의 자세를 가질 이유가 없으며, 이와 같은 태도는 공동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서로에게 빚지며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가질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갈라놓는 소득, 재산, 지위의 불평등이 능력이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현실의 근저에 바로 이 능력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능력주의의 함정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좀 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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