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된 한국와인2018년 광명동굴 대한민국 와인 페스티벌
이대형
우리나라에서 유럽 형태의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부터이다. 뚝섬 원예 모범장(纛島園藝模範場, 농촌진흥청 전신)에서 생산된 '레드 워싱톤(식용품종)' 포도로 시험 양조를 하면서이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서 15개, 일본에서 106개, 중국에서 4개, 프랑스에서 3개, 이탈리아에서 25개 품종 등 총 153개 품종이 도입되었다. 이 당시 기록에 의하면 피노 그리(Pinot gris), 피노 누아(Pinot noir), 보르도 누아(Bordeaux noir) 등 유럽의 우수한 품종이 조선에서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활발한 포도주 생산은 포항의 미쯔와(三輪) 포도원이 대표적이었다. 미쯔와(三輪) 포도주는 1920년대에 경북 포항 동해면과 오천면 일대에 있던 미쯔와 포항농장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들어졌다. 미쯔와 포도농장은 1934년 기준으로 넓이가 200만㎡에 가까웠고 연간 생포도주 800석, 브랜디 100석, 감미 포도주 500석을 생산하였으며 연 3만 2000여명 넘는 조선인을 고용하는 동양에서 가장 큰 포도농장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실제 소비자들이 마실 수 있는 상업적 와인의 재료는 포도가 아닌 사과였다. 1969년께 생산된 애플 와인이다. 이후 포도주가 처음 생산된 것은 1974년 순수한 국산 포도로 만든 노블와인이 출시되면서이다.
1977년에는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는 마주앙이 출시되었고, 지속적으로 다양한 업체에서 포도주를 생산했다. 하지만 1990년대 수입 자유화로 외국산 와인과의 경쟁이 심화하자 국산 와인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이러한 국산 와인에 있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일이 생겼다. 먼저 1993년 지역특산주(농민주) 면허가 생겨나면서부터이다. 지역특산주는 대형양조장이 아닌 과일을 재배하는 농민이 술을 만들 수 있는 '와이너리형' 농가의 등장 토대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2004년 한-칠레 에프티에이(FTA)는 포도를 재배하는 농민들에게 가공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FTA가 타결되면서 포도 농가들은 타격을 입었다. 농민들은 자구책으로 새로운 부가가치 상품이 필요했다. 이때 여러 종류의 가공품이 만들어졌고 그중 하나가 한국 와인이다.
하지만 당시 양조 기술의 수준은 열약했다. 집에서 설탕을 섞어 만든 수제 포도주와 다를 바 없었다. 유럽 와이너리들이 사용하는 양조용 포도가 아니라 식용 포도가 재료였다. 당도는 낮고 즙이 많았다. 설탕을 추가로 넣지 않으면 알코올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들이 양산되었고 소비자들은 외면했다. 많은 술 전문가들은 품종, 기후, 기술력 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고 한국에선 와인을 만들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와인 생산자들의 꾸준한 연구와 새로운 발효 방법 등의 접목 노력은 이러한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먼저 양조용 포도 품종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청수'라는 화이트 와인용 국산 품종도 탄생했다.
또한 유럽의 양조용 포도를 심고서 우리만의 재배법으로 키운 양조용 포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품종의 사용은 지금까지 향이 부족했던 한국 와인에 다양한 향들을 불어 넣었다.
식용 포도 품종에 맞는 발효 방법도 개발됐다. 부족한 당도는 포도즙을 얼려서 수분을 제거해서 당도를 높이는 것으로 극복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수확을 늦게 함으로써 포도 자체를 반건조 상태로 만들어 수분을 제거하는 방법도 사용하였다.
한국 와인, 청와대 단골 만찬주로 등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