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섬의 동백나무 숲 박성배씨는 저 숲 어딘가로 몸을 숨겨서 겨우 살아 남았다.
박기철
사건 이후, 오랜 기간 가라앉았던 진실
당시 구금돼 있는 사람들의 식사는 가족들이 책임졌다. 그래서 매일 식사를 가져다 날랐는데, 어느 날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이 없어지자 매우 놀랐다. 이후 그들이 갈매기섬으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은 바로 배를 띄우려 했다. 하지만 경찰들은 이들을 방해했고, 갈매기섬으로 가려는 일부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유족들은 해남에서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모두 철수한 이후인 8월이 돼서야 갈매기섬으로 갈 수 있었다. 섬에 도착한 유족들은 그 참혹한 모습에 말을 잃었다. 더운 날씨의 시신의 배는 부풀어 올랐고 파리떼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런데 시신을 수습하던 유족들에게 뭔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것은 생존자였는데 마치 귀신같은 몰골이라 유족들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일부 생존자들은 유족들에게 발견돼 겨우 돌아왔다.
생존자들은 이후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부역하다가 수복 이후 다시 살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박상성배씨는 자신이 갈매기섬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오랜 기간 입을 닫았다.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기 싫은 것도 있었고 감히 경찰이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말을 했다가 어떤 보복을 당할지 겁이 났었다.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입을 닫았던 그는 유족들의 끈질긴 설득과 하소연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유족들에게 본인의 경험을 조금씩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그날의 끔찍한 일들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4년 박상배씨와 유족들은 갈매기섬으로 가서 다시 일부 유해를 수습한다.
하지만 당시 군부 정권은 해남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조금씩 드러나던 진실은 더 이상 밝혀지지 못한 채 다시 오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일부 유해를 수습해 현장 인근에 매장하게 된다.
이후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충북대학교 유해발굴센터에 의뢰해 갈매기섬의 유해 발굴에 나선다. 사건이 있은 지 수십 년에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유해는 매장되지 않은 채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카빈과 M1 소총의 탄피와 탄두가 나왔다. 또한 '자연발화로 볼 수 없는 고열로 불탄 뼈조각들이 분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섬을 떠났던 경찰들이 다시 돌아와 시신에 불을 질렀다는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해는 총 19구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총 74명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고, 미확인된 피해자까지 합치면 약 100여 명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갈매기섬으로 가던 중 수장된 인원과 시신이 섬의 기후에 오랜 시간 방치됐던 점 등을 감안하면 총 사망자는 200~300여 명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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