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장 수여배움의 열정을 이어온 졸업생들에게 군산시장이 졸업장을 수여하는 모습
강양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지난 2월 28일, 초등학력 인정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군산시 늘푸른 학교의 졸업식. 식전 공연으로 오카리나의 연주가 시작됐다.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동요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노래. 그래서일까. 오카리나의 소리가 애잔한 울림으로 장내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
코로나로 학습의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온 졸업생 30여 명과 가족, 선생님들, 그리고 군산시장, 시의원, 국회의원 및 여러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식이 진행됐다. 시장의 인사 말씀에 이은 한 국회의원의 진솔한 축사에 가슴이 뭉클했다. "제 어머니도 글을 쓰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낭송했다. 눈물이 많은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나갔다. 그 떨림의 진동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참아보려 해도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이 순간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60년 동안 꿈꿔왔을 학생이라는 이름을.
어느날 걸려온 그 전화
3년 전, 어느 가을날. 남편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외삼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전화를 끊고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며 그는 뒤돌아 끝내 울먹였다. 처음이었다. 내게 늘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의 커다란 등이 흐느끼고 있었다.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외삼촌은 담담한 목소리로 두 여동생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글을 배울 수 있는지 남편이 한번 알아봐 줬으면 하는 내용의 통화였다. 외삼촌 마음에 늘 걸렸던 두 여동생 중에 한 명은 바로 우리 순자씨. 남편의 어머니이자 나의 어머니다. 나는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내가 한번 알아볼게."
다음날 아침,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시에서 운영하는 성인문해교육 프로그램이 있음을 알아냈고 몇 번의 통화 끝에 담당자와 연결됐다. 그리고 알아본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혹여 어머니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몇 번의 고민 끝에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다음날 바로 센터에 찾아가 우리 배움터 한글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동안 배움의 갈증을 꽤 깊이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단시간에 결정을 내리고 바로 방문하신 걸 보면 좀 더 빨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 갈증. 집안 살림과 자녀의 뒷바라지에 목마르다 할 수 없었을 테지. 갈증의 깊이만큼 배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고백은 더욱 뱉기 어려웠을 테니까.
어머니는 야간반을 시작으로 학급반이 되어 열심히 배우러 다니셨다. 코로나19가 시작되자 대면 수업은 어려워졌지만 비대면 수업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선생님과 매일 통화하며 부지런히 책을 읽고 썼다. 어머니의 꾸준함은 마침내 혼자서도 은행 업무를 볼 수 있게 했고, 공부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운전면허를 취득해 운전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조금 늦은 시작이라고 해도
나는 얼마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쇼핑에 나섰다. 교복은 없지만 평일 교복이 되어줄 평상복 몇 벌을 골랐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취향의 노트, 다이어리, 형광펜, 수정테이프, 볼펜, 자, 예쁜 스티커 등을 고른 뒤 이름 스티커 자판기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입력해 이름스티커를 인쇄했다. 학용품에 이름 스티커를 붙이며 신기해하던 어머니는 참 좋다며 말했다. "고맙다. 누가 나한테 이런 걸 사주겠니."
뭐랄까. 내 힘이 닿는 데까지 해드리고 싶은 마음. 그 시대에 누렸어야 할, 그리고 누리고 싶었을 감정.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어머니 집에서도 사랑받는 학생이라고 보여주고 싶으니까. 나는 어머니를 위해 당 떨어질 때 필요한 사탕, 초콜릿 꾸러미를 친구들과 나눠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담아 넣었다. 누구나 당신을 귀하게 여길 수 있도록.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