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날 세운 비석. 비문은 대산 이상정(1711~1781)이 지었다. 왼쪽에 문자 없는 비석이 보인다.
장호철
생육신은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에 비긴 이름이다. 사육신과 생육신은 '삶과 죽음'으로 갈리긴 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무도한 권력에 저항하고 절의를 지켜 그 경중을 다투기 어렵다.
중종반정(1506) 후 사림파가 등장하고,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맹전은 숙종 때 선산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고, 1781년(정조 5) 이조판서와 시호 '정간(靖簡)'을 추증받았다.
유허비는 숙종 때에 선산 부사 김만증이 이맹전이 태어난 형곡에 비각과 함께 세웠다. 사각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운 간결한 구조인데, 도시개발로 중앙도서관 옆으로 옮겨왔다. 이맹전은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에 묻혔는데, 뒷날 세운 비석의 비문은 대산 이상정(1711~1781)이 지었다.
사육신 하위지, 이맹전과 함께 월암서원에 제향
생육신 이맹전을 낳은 구미는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1412~1456)의 고향이기도 하다. 본관이 진주, 호를 단계(丹溪)로 쓰는 하위지는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부터 주로 집현전에서 일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며 성장한 하위지는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벗어 던지고 선산으로 퇴거하였다.
1456년(세조 2) 김질의 고변(告變)으로 단종 복위 운동이 탄로 나 국문을 받게 되자 그는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1456년 6월(음력) 성삼문·이개·유응부·김문기·권자신 등이 군기감 앞에서 조정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그의 두 아들도 연좌로 죽임을 당했다. 뒷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은 자신의 문집 <추강선생문집>에 실린 사육신 전기 '육신전'에서 하위지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려고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