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흥양현 지도
오문수
그리하여 세종 23년(1441년)에 현의 이름을 고흥의 '흥'자와 남양의 '양'자를 조합해 '흥양현'으로 개명하고 치소를 주월산 아래(현 군청자리)에 정하고 흥양읍성을 축조했다. 흥양이란 지명은 1441년부터 1914년까지 명실공히 고흥을 대표한 지명이었다.
흥양읍성 규모는 주위가 3500척, 높이는 평지가 12척, 높고 험한 지대는 9척 4촌, 여장 높이는 3척이며 적대가 11개소, 문이 2개소로 옹성은 없었다. 여장이 574이고 성안에 우물이 5개소이고 해자도 없었다. 1452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 도체찰사 '정분'이 주장해 옹성을 쌓았다.
행정구역이 정비됨에 따라 고흥에는 1개의 첨절제사영과(사도진)과 발포진, 녹도진, 여도진의 3개 만호영이 설치되어 관방이 정비되었다. 이는 전라좌수영 관하 고흥이 거의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였다는 점과 큰 섬지역이 많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혼신을 다해 군수물자 조달에 힘쓴 고흥
전쟁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군인, 무기, 식량을 들 수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영 수군으로 참전해 4차례 해전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211명(사망 38, 부상 173) 중 131명이 고흥 출신이었다. 병사로 참여한 사람도 많았지만 후방에서 배를 만들고 식량을 조달한 사람들도 많았다.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계에 따르면 "흥양의 유방군(진지에 머물러 있는 군사)으로 하여금 도양장(도양목장)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밖의 남은 땅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소작하게 하고 말들은 절이도(현 거금도)로 옮겨 모으면 될 것"이라고 조정에 주장하여 실현되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1593년 7월 7일, 7월 13일 1594년 2월 6일, 11월 23일, 1595년 11월 13일, 1596년 2월 8일, 6월 19일에 고흥에서 군량미가 생산되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흥양현에서는 비상통신수단인 봉수를 정비하고 병선 건조를 위해 23곳의 소나무밭을 지정해 관리 감독했다. 팔영산, 마북산, 천등산, 소록도 등의 소나무는 전선을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초기 좌수영 조선소에서 일했던 214명의 목수 중 1/3인 77명이 고흥 출신이었다.
이순신에 의하면 군량은 거의 전라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백사 이항복은 선조에게 보고하기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수군 기지인 광양, 순천, 낙안, 흥양 네 고을에 남아있는 공사민물(公私民物)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할 만큼 7년 동안 큰 고난을 겪었다"고 했다.